스웨덴 출신의 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은 유럽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944년 조지 큐커 감독의 영화 ‘가스라이트(Gas Light·가스등)’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녀의 손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쥐어 준 이 영화는 1938년 패트릭 해밀턴이 연출한 동명의 연극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화는 런던의 한 저택에서 앨리스 앨퀴스트가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범인은 알 수 없고 상속자는 조카 폴라뿐이다. 실의에 빠져 이탈리아로 떠난 폴라는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런던으로 돌아온 후 폴라는 이상한 일을 겪는다. 남편이 외출한 후 집 안의 가스등 불빛이 희미해지고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해도 남편은 그녀의 정신착란 증세 때문이라고 몰아세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던 그녀도 정신이상이라는 남편의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다. 가스등 불빛이 희미해진 것은 가스 배관이 연결된 다락방의 가스등을 켰기 때문인데 남편은 그녀의 정신착란 탓으로 돌린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앨퀴스트를 죽인 후 보석을 훔치기 위해 다락방을 뒤졌고 아내를 정신이상자로 몰았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가스라이트’는 빛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움켜쥐고 상대방의 정신을 서서히 장악해가는 인간의 심리 변화를 예술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월이 한참 지난 2007년 정신분석가인 로빈 스턴 박사는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가하는 정서적인 학대를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심리학 용어로 정립했다. 반복적인 세뇌를 이용한 정서적 학대로 ‘노예화’와 동의어로도 쓰인다.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남녀 간 정서적 학대나 강압 등을 표현하는 용어로도 활용된다.
최근 ‘가스라이팅’이 실시간 검색어로 오르며 뜨거운 관심을 끌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원종건씨의 전 여자친구가 “여혐과 가스라이팅으로 괴로움을 겪었다”고 폭로하면서 원씨가 영입인재 자격을 반납한 것이다. 여야가 총선을 앞두고 인재영입 경쟁에 나선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인기몰이만 하다가 가장 기본적인 검증 절차마저 놓치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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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정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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