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것은 상처에 붕대를 감지 않아 계속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4월 아르메니아를 방문해 100년 전 벌어진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살해를 대학살로 지칭하고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교황청이 이를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20세기에 벌어진 첫 번째 대학살이다. 러시아 공산주의혁명 이후 2,000만명, 홀로코스트의 1,100만명 대학살의 전조였던 셈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 코카서스에 있는 아르메니아는 유구하면서도 비극적인 역사를 가졌다. 정신적 랜드마크인 아라라트산은 노아의 방주가 세상의 끝에서 머물렀다던 곳이다. 수도 예레반은 2018년에 탄생 2800주년을 기념했을 정도다. 수도 인근에는 기원전 4000년께의 유적들이 즐비하다. 아르메니아는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기 전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최초의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점은 문명의 교차점에 위치해 페르시아·동로마·몽골·튀르크(셀주크·오스만)·소련 등 세계 제국들의 지배 하에 어렵게 생존해왔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이슬람계 오스만제국 아래 있을 때 일어났다. 1894~1896년과 1909년 3~4월 10만~30만명이 죽었고 1차대전 중에는 무려 150만명 가량의 대량학살(genocide·제노사이드)이 벌어졌다.
첫 사건은 러시아 남하를 계기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학살은 1차대전의 와중에 영국이 오스만을 침공하자 반란을 우려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이라크 일대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미국 상원이 최근 1차대전 중 오스만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0월 미국 하원 결의안 처리를 이은 것이다. 미국은 자유와 인권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늦었다고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아직도 30여개국에 불과하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코소보 전쟁, 미얀마의 로힝야족 등 학살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인류의 비극은 언제 끝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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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환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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