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으며 쫓기듯 지나간다. 서울에서 사진작가인 친구가 보내준 속초의 미시령고개에는 푸른 하늘과 단풍든 숲, 실 같은 샛길이 지나는 울창한 숲들이 강물로 갓 씻어 놓은 듯 맑아서, 내가 거기 서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가을! 하면 ‘악의 꽃‘에 담긴 ’가을의 노래‘가, 보들레르의 슬픔이 생각난다.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잘 가거라, 너무나 짧았던 여름의 눈부신 빛이여!/ 벌써 마당 돌바닥에 장작 부리는 소리가/ 음산한 충격으로 내게 들려온다.// 겨울의 모든 것들이 내 안으로 다시 돌아오겠지./ 분노, 증오, 전율, 두려움, 피할 수 없는 고역./ 내 마음은 북극의 지옥에 갇힌 태양처럼/ 붉게 얼어붙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샤를 보들레르 ‘가을의 노래’ 부분>
게티 센터에서 에드와르 마네 전시회가 있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혼자서 갔다. 입구에서부터 마네의 ‘스프링’을 큰 벽에 전시해 놓았다. 약간 흥분된 기분으로 전시회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서 마네의 작품들을 오래 서서 보았다. 거장들의 그늘에 가려서 그의 작품이나 예술사에 끼친 공은 별로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를 보면서 그가 프랑스 인상주의의 선구자였음을, 또 프랑스 현대화를 이끈 화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와 친분을 가졌던 시인들, 예술가들과의 교분을 생각하면, 그의 작품을 감히 캔버스 표피를 물들인 색채의 퍼즐정도로 무지하게 평가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꼭 가게 되는 뒤쪽 건물에서 여러 화가들의 그림과 조각들을 보며 도도한 역사의 굴곡을 헤쳐 온 예술의 광장을 걷고 걸었다. 로댕의 조각에는 그의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과 슬픔과 미가 마디마디에서 포효하고 있고,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영혼의 울부짖음이 터질듯이 그림에서 튀어 나오며, 자코메티의 뼈대만 남은 길쭉한 몸체에서는 실존적 고독과 슬픔을, 삶의 인내를 몸으로 느끼며 걸었다.
그림은 화가의 혼신이 깃든 생명체로, 같이 숨을 쉬고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예술이기에, 그림과 문학은 쌍벽을 이루며 역사의 길을 같이 걸어왔다.
문학이 인류의 삶을 글로 형상화하면 그림은 색채로 그 감동을 그리면서 상징주의 문학과 인상주의 그림은 같은 길을 걸어왔다.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은 창백한 정신의 세계를 끈질기게 추구하는 둘만의 따스한 우정을 이 순간도 느끼게 한다.
내가 말라르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앙드레 지드의 소설에 몰두하면서부터다. 또 말라르메는 순수시를 위해 인생을 철두철미 디자인해서 살았기에, 그의 인내의 삶과 난해한 시의 세계에 끌렸었다. 마네가 말라르메의 ‘화요회’에 참석해 교감을 나누던 사이여서 더욱 애착이 간다.
말라르메는 당시 최고 지성인들인 문인들과 예술인들과 파리의 롬가 아파트에서 ‘화요회’란 모임을 이끌며, 밤늦은 시간까지 ‘절대 미’를 추구하면서 전생을 보냈다. 당시 마네는 ‘화요회’ 모임에 고갱과 모네와 더불어 자주 참석했다고 한다.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나 <올랭피아>에서 나부를 그린 화가라는 좀 어색했던 인상이, 그들의 우정으로 인해 미학으로 가는 이유 있는 행위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네의 그림을 만나고, 그의 친구 말라르메를 가슴 저리게 회상할 수 있어 의미 있는 나들이였다.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여서일까, 요즈음 문인들의 출판기념회와 화가들의 전시회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역시 가을은 풍족한 계절이다.
<
김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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