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신념 제로, 확신 제로, 열정 제로. 그냥 또 하나의 일요일.” 무대에서 남자 주인공 지미 포터가 무기력한 표정으로 이런 독백을 내뱉는다. 1956년 5월 영국 로열코트극장에서 선보인 존 오즈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의 한 장면이다. 오즈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답답한 영국의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기성세대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전후 젊은 세대의 분노와 열망을 대변했다는 이유에서다.
오즈번의 작품은 이후 ‘앵그리 영맨(성난 젊은이)’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당대 청년 저항문화의 모태로 자리 잡았다. “어른들은 세상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대목은 박탈감에 휩싸여 있던 청년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당시에도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하거니와 복지사회라는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주류세력의 전형으로 비판받았다고 한다.
기성세대의 위선에 대한 분노는 프랑스의 ‘68운동’으로 이어져 낡은 가치관과 권위주의에 맞선 새로운 청년문화를 일궈냈다. 1968년 5월 대학생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기성 사회체제와 관료주의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결국 샤를 드골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몇해 전 68운동 기념행사 참석차 캠퍼스를 찾았던 과거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기성 정치인으로 타락했다며 ‘혁명의 변절자’로 불리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최근 프랑스 젊은이들이 극우정당의 주요 지지세력으로 돌아선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날로 격화하는 홍콩의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반대시위에서 10~20대의 앵그리 영맨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다. 중고교생들은 이틀째 동맹휴학을 벌이며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는 양상이다. 홍콩의 앵그리 영맨들은 중국 당국의 압박으로 홍콩의 장래가 불안하다며 ‘미래가 없는데 수업이 무슨 필요인가’라는 구호까지 내걸었다고 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의혹이 커지면서 청년들의 분노가 치솟고 있다. 정부의 장밋빛 전망과 달리 자신들의 삶이 개선되기는커녕 새로운 주류세력의 불공정 논란이 불거지자 촛불시위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국의 앵그리 영맨들이 우리 사회 지형에 어떤 구조적 변혁을 가져올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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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범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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