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당 조만식 선생(작은 사진)의 외손녀 정인덕씨가 할아버지의 동상 제막식 안내문을 보여주고 있다.
고당 조만식 선생 외손녀 정인덕 씨 폴스처치 거주
1920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일본제품 불매운동 주도
일제강점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주도했던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의 후손이 버지니아에 살고 있다. 주인공은 폴스처치에 거주하는 정인덕(79)씨로 고당 선생의 외손녀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고당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됐으며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은 물론 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을 추진했던 민립대학 기성회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했다.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공산군에 의해 살해됐다.
1940년 평양에서 태어난 정인덕씨는 1946년 서울로 내려오기 전까지 6년 동안이 외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억의 전부다. 당시 7살이었던 정인덕씨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는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포를 두고 내려갈 수 없다며 북한에 남았지만 마지막까지 북한 김일성과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설득과 회유에 넘어가지 않아 결국 살해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정인덕씨는 또 “고당 선생의 맏딸인 어머니(조선부)는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면 찬양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항상 불러주셨다”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최근 한일갈등과 관련해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인덕씨는 “할아버지는 1920년대에도 일제의 경제 수탈정책에 맞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었다”며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자기네 식민지로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고 있다며 통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덕씨는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고당의 유언도 들려주었다. “내가 죽으면 한쪽 눈은 조국의 독립을 볼 수 있게, 다른 한쪽 눈은 일본의 패망을 볼 수 있게 남겨놓으라”는 독립의 절절한 열망을 담은 마지막 유지였다.
1973년 이민 온 정인덕씨는 남편 강창제씨와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고당 선생은 197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에 추서되었으며 1991년 열린 추모식에서는 고당 선생의 시신이 아닌 1946년 고려호텔 감금 당시 할머니가 지니고 온 고당 선생의 손톱과 머리카락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고당 선생의 동상은 서울 어린이대공원과 경기도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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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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