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성결교회 목사
1950년 7월 중순부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인민학교(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우선 노래부터 배웠다. 김일성 찬가가 대표사례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만약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에서 이 노래 불렀다가는 당장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될 수도 있다.
두 달 정도 지나 9월 중순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내 고향이 인천에서 가까웠다. 해질 무렵 동네 어른들을 따라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해군함정에서 대포 쏘는 소리가 산천도 울리고 내 어린 가슴도 흔들어 놓았다. 인천은 완전히 불바다였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노래도 뒤집어졌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여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4.19 데모 때도 열심히 불렀던 군가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겪은 한국전쟁의 체험은 나에게 세 개의 낱말로 요약되어 심장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 전우, 원수, 그리고 원쑤이다. 여러 해 지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으로 입대하여 신병훈련소 하사관 교관으로 병역을 마쳤다. 전우라는 말은 군대생활에서의 친구를 뜻한다. 특히 전쟁터의 친구, 삶과 죽음을 함께 나누는 친구다. 그리고 전우의 반대가 바로 원수 곧 적군이다. 전쟁터에서는 아군과 적군만 있다. 친구 아니면 원수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원수라고 쓰지 않고 ‘원쑤’라고 한다. 원수(元首)는 오직 한 사람 김일성 수령에게만 붙여지는 호칭인 걸 누구나 안다. 그런 지엄한 이름과 구별하여 쓰자니까 ‘원쑤’가 된다. 구어체 서울말인 ‘웬수’보다 훨씬 증오심이 더 넘쳐흐른다.
최근 평양성경연구소에서 발행한 ‘영어-평양말 대역성경’을 읽었다. 평양 김형직사범대에서 교육에 종사했던 김현식 교수가 책임번역을 했다. 지금은 수도 워싱턴에 거주한다. 신약성경인데 ‘하나님의 약속:예수 후편’이라고 이름했다. 서울 홍성사에서 두해 전에 출판했다.
한국말 성경이라면 지금까지는 서울표준말로 된 것만 읽었는데 신약성경뿐이지만 평양말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번역을 주도했고 그 성경을 기증해 준 김 교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1989년에 평양을 방문 ‘기독교평양복음화대회’를 추진했던 일, 김일성종합대학교 종교학과 특강교수로도 초빙되었던 일, 북조선 방문기를 서울에서 발행되는 언론에 비판적으로 썼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살해협박을 받았고, 종교학과 강의도 취소되었던 일들이 내게 있었다. 그래서 북조선 복음화를 위하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평양말 성경의 출현은 평양을 다시금 아시아의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는 발화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성경은 평양표준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례배, 률법, 려관, 량식이라 했다. 비유는 빗댄 이야기, 할례는 잘라냄 예식, 유월절은 건너뜀 명절, 사도는 핵심제자, 안식일은 은정의 휴식일, 회당은 군중회관, 족보는 가계표, 옥합은 설화석고단지, 방언은 알 수 없는 말, 복음은 반가운 소식 등으로 했다. 평양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들이 남새(채소), 담보한다(보증한다), 부화한다(간음하다) 등이다.
비록 평양표준말이 서울표준말과 다르다고는 해도 서로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다. 원수를 원쑤라고 해도 의사불통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는 서울에서도 친구이고 평양에서도 친구 그대로 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자어의 구(仇)라는 글자는 짝/원수라는 서로 반대되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친구가 원수이기도 하고 원수가 친구도 될 수 있다고 풀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서울과 평양이 ‘원쑤관계’를 속히 청산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서 어서 친구 그것도 생명을 함께 나누는 전우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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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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