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은 정치인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늘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중요한 내용이나 만난 사람들을 메모했다. 이렇게 해서 얻은 별명이 ‘수첩 공주’다. 당초 긍정적 의미로 쓰였던 이 별명은 나중에 부정적 이미지로 변했다.
상대 정당은 “수첩이 없으면 말을 제대로 못 한다”고 깎아내렸다. 집권 후 ‘수첩 인사’라는 조롱까지 나왔다. 수첩에 적힌 사람만 기용하는 폐쇄적 인사라고 비꼰 것이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2년 동안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수첩 63권에 꾸준히 기록했다. 이는 국정농단 사태 때 박 전 대통령과 안 전 수석 자신의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하는 근거 자료가 됐다.
민주화 과정의 라이벌인 양 김은 수첩과 관련해서도 상반된 스타일을 보여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늘 갖고 다니던 수첩에는 메모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수첩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 기자 출신의 김성호 전 의원은 “YS는 군사 정권의 탄압에 악용될 수 있는 근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며 메모하지 않았다”면서 “DJ는 정치 비밀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아이디어나 연설에서 인용할 내용은 항상 메모했다”고 전했다.
조해진 전 의원은 새누리당 의원 시절 자신의 일정과 신앙, 세 딸에 대한 메모를 각각 담은 네 권의 수첩을 지니고 다녀 눈길을 끌었다. 2015년 국회에서는 ‘(정윤회) 문건 유출 파동의 배후는 K·Y’라는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이 사진에 찍혀 공개돼 정국을 달궜다. 여기서 K는 김무성 의원, Y는 유승민 의원이다. 2016년 4월 총선 전후로 박 전 대통령과 K·Y 두 사람이 등을 돌리면서 총선 참패와 국정농단 사태로 이어졌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최근 산불 대책 회의를 주재하면서 쓴 ‘깨알 수첩’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 총리는 수첩에 산불 피해와 투입된 장비·인력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총리 비서실장이 페이스북에 이 총리의 메모 8쪽을 사진으로 찍어 올렸다.
언론 매체들이 2인자의 수첩을 집중 소개하자 이 총리의 대선주자 지지율도 올랐다. ‘보수 전사’를 자임하는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은 즉각 ‘쇼’라고 공격했다.
이 의원은 “전 정권 때는 ‘수첩 공주’라고 비판하더니 ‘수첩 왕자’는 괜찮은가”라고 반문했다. 대선 예비주자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는 것을 보니 차기 대선의 막이 서서히 오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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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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