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저 멀쩡한 사람이에요.” 금테 안경의 중년여성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앉는다. 미치거나 우울한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조울증? 아니면 경계성 성격장애나 자애성 성격장애? 골치 아픈 환자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간다.
“명랑해 보이시네요.” 이런 환자에겐 우선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좋다. “다들 그렇게 말해요.” 경계의 빗장을 조금 풀어놓는 듯싶다. “날씨가 추운데 혹시 감기 안 걸리셨나요?” 일상적 관심사를 먼저 꺼내는 것은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가는 방법의 하나다.
“감기는 아닌데 지난 1년 동안 잠도 잘 못자고, 머리도 지근지근 아프고, 소화도 잘 안되는지 속이 거북하고 항상 피로해서 고생이 많아요.”
내과의사를 찾는 환자들의 60-70%가 실은 마음이 불편해서 신체증세를 일으키는 경우다.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심리적 갈등이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방어기전에 의해 여러 신체증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의학용어로 신체화(Somatozation)라 부른다.
날로 복잡하고 경쟁이 심한 사회에 살면서 현대인들은 우울증을 피해가기가 힘들다. 스트레스, 분노, 갈등은 현대인들을 옭매는 족쇄나 걸림돌이다.
우울증은 단순히 기분장애가 아니다. 먹고 자는 생명활동의 장애, 기억력 집중력 장애, 주의력 결핍으로 자신이 바보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인지기능 장애 그리고 두통 요통 소화불량 등 여러 신체증상을 수반하는 전신적 질환(Whole disease)으로 반드시 치료를 요한다. 우울증은 여러 가지로 나누는데 그 중 가면우울증(혹은 미소우울증)도 있다.
가면우울증 환자는 우울한 기분이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스스로 우울증과 거리가 먼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가슴 한켠엔 슬픔 답답함 외로움 공허함이 쌓여 있다. 언제나 명랑한 표정을 짓지만 이는 우울감을 감추기 위한 무의식적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면우울증 환자들은 각종 신체증세를 호소하며 일반 의사를 찾는다. 의사 진단과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고 해도 안심은커녕 오히려 무슨 큰 병이 있는데 의사들이 찾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상당수의 환자들이 이 의사 저 의사 찾아다니는 건강염려증과 이에 따른 강박증, 불안증 그리고 술이나 마약물질로 극복하려는 중독증도 함께 가지고 있어 치료에 어려움을 겪는다. 전체 우울증의 절반 이상이 가면우울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통계이다.
앞의 중년여성은 정상적 성장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은 후 새 엄마 손에 자랐다. 새 엄마가 잘 해주었으나 늘 친엄마의 사랑이 그리웠다. 가끔 아버지와 새 엄마가 다툴 때면 혹시 자기 때문일까 싶어 항상 웃고 명랑한척 했다.
대학 마치고 좋은 남편 만나 원만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다. 일을 하면 나을 듯싶어 백화점 화장품 부에서 일하기 시작해 매니저로 승진도 했다. 그러나 공허함은 줄어들지 않고 직업 스트레스 때문에 신체증상들이 악화되자 내과의사를 찾았고, 내과의사 권고로 정신과 진료실로 왔다.
가면우울증은 세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공존질환이 흔하고, 방어기전을 과도하게 사용하며, 자신의 병에 대한 성찰이 없다. 정신분열병, 심한 양극성장애와 주요우울증 환자들은 망상과 환각증세 등 정신증상(Psychotic) 때문에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다. 자신이 병자인 걸 진짜로 모르는 것이다.
알코올 약물 중독자, 경계성 성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도 잠시 비현실적 사고와 행동을 보이며 자신의 병을 부정한다.
가면우울증 환자는 현실세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 미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병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겉으로는 없는 척하지만 우울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내면에 깔려 있다.
이점 유의하여 항우울제와 대화요법을 쓰며 인내심과 공감인식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면 어렵지만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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