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팔십이 된 사람이 ‘친구야! 놀자’ 하며 아직도 친구를 찾아다닌다면 좀 주책스럽기도 하고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늙어갈수록 친구가 필요하고 소중하게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라스모어라는 은퇴 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매일 운동을 함께하는 한인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아침 여덟시에 운동이 끝나면 우리는 ‘오늘은 어디 가서 커피를 마시고 아침을 먹지?’하며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큰 테이블이 있는 맥도널드에 가고, 적게 모이면 타코벨에 간다. 타코벨에서는 멕시코계 여직원들을 잘 사귀어 놓아서 커피를 공짜로 준다. 1달러짜리 부리또나 카사디아를 먹으면 단돈 1달러로 아침이 해결되니 미국이라는 축복의 땅에 살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우리는 몇번씩 말하고 또 떠들어댄다.
요즘 이 은퇴 촌에도 슬슬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벌써 네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가까운 친구들의 남편 둘이 세상을 떠났고, 얼마 전에는 아주 친했던 친구 한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알 수 없는 것은 금방 죽을 것 같던 사람은 안 죽고 생각지도 못했던 친구가 갑자기 떠나는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핸디캡이야.” 죽은 친구는 늘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이 요즘 사실로 증명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눈이 나빠져 점점 실명이 돼 가고, 또 누군가는 귀가 안들려 반밖에 듣지 못하고, 별안간 이가 몽땅 빠져 하루아침에 폭삭 늙은 할망구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무릎이 아픈 것은 이제 애교고, 어지럼증 때문에 불평을 했더니 의사 말이 늙어서 그러니 그렇게 알고 그런대로 살라고 했단다. 그런 얘기까지 들으니 어디 억울해서 살겠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이 귀가 나빠진 것을 시로 썼다. ‘이제 귀가 반밖에 들리지 않아도 감사하다.’ 이 한마디는 정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팔십이 넘어서도 이렇게 자알 살고 있다는 말, 이젠 살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뜻, 지금 세상을 떠난다 해도 별로 억울할 것이 없다는 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또 십년쯤 남보다 더 산다 해도 먼저 가고 나중 갈 뿐이지 가는 곳은 다 똑 같다.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병원에 갇혀 산다면 그건 사는 게 아니고 인간의 존엄이란 눈 씻고 봐도 없어서 오히려 죽는 게 나을 것 같다.
얼마 전 치매가 와서 이젠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차량국의 통보를 받은 친구가 있다. 미국에서 운전을 못한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운전은 자유를 준다. 운전을 못한다면 살아도 반밖에 살지 못하는 것이나 같다. 또 한 이웃은 미나리를 뜯다가 넘어져 크게 다쳤다. 나이 구십의 이 할머니는 아직도 자신이 젊었다고 착각하고 살아서 벌써 몇 번을 넘어져 병원에 실려 갔다.
이젠 주변에서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슬슬 줄어들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들이 많다. 머리가 아파서,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서, 잠을 잘 못자서 … 함께 나가 놀자면 나갈 수가 없단다.
‘친구야! 놀자!’ 하며 달려갈 수 있는 친구가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수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운전도 못하고 벤치에 앉아 빨리 오지 않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는 처지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처량하고 슬프지만 이것이 다 인생의 한 고비임을 깨닫는다. 그래도 아직은 ‘친구야! 놀자!’ 하면 달려 나올 수 있는 친구가 몇 명 있다는 것이 새삼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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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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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내세요. 오늘도 하늘은 높고 프르며, 앞 뒷뜰 나무는 꽃을 피우고, 새 들은 노랠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