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당연히 화사하게 꽃이 핀 풍경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지난 4월에는 눈이 내렸고 눈이 끝나면 다시 비가 내렸다. 빈 가지 뒤로 흔들리는 잿빛 하늘은 벽에 걸린 수묵화처럼 늘 같은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회색 빛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잿빛 하늘에 몸을 숨긴 해가 서녘으로 넘어 가려던 시간이었다. 정확히는 우편배달부가 우편물을 놓고 간 직후부터 다시 비가 내렸다. 우편물에는 며칠 전 주문한 책 꾸러미가 끼어 있었고 그래서 마음만은 넉넉해지던 오후, 마침내 이번 비가 봄과 함께 문턱을 넘어서고 있음을 직감했던 날이었다.
낯선 번호로부터 걸려 온 전화는 오랫동안 끊어지지 않고 울렸다.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으나 핸드폰에 입력된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이니 그냥 무시하기로 하고 배달된 책을 뒤적였다. 그러고 보니 늘 지니고 다니는 전화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번호가 모리스 부호처럼 찍혀 있다.
그 중에는 이제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생소한 이름도 있고 서로 연락할 이유가 없어진 사람도, 필요에 의해 잠시 저장해 두었던 번호도 남아 있다. 미국에 온 후 통화 한번 한 적 없는 그리운 이름이 있었고 갑자기 안부가 궁금해졌다.
문득 그동안 스치고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름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이들과 따뜻한 밥 한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와 같은 절망과 희망으로 일상이 얼룩진 이들과 소박한 저녁식탁을 마주하고 싶은 그런 오후였다.
한때 가깝게 지냈던 교우가 학회 참석 차 뉴욕에 와 있다며 차나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차가 아니라 근사한 식당에서 와인이 있는 저녁을 대접하고 싶을 정도의 마음의 부채가 남아 있는 친구였다. 몇 해 전 한국 방문 중에도 사소한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못했던 터라 이번에는 기꺼이 시간을 내야하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내 자리를 비워야 하는 최소한의 반나절이 부담스러웠다.
오래 전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음 속 이야기를 편하게 했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그와 할 수 있는 것이 안부 인사 외에는 별로 없다는 것, 설령 그와 만난다고 해도 그동안 공유하지 못한 시공간을 뛰어 넘지 못하는 공허한 대화가 언어의 유희처럼 느껴 질 거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물론 내가 비워야 하는 그 반나절의 시간동안 벌어질 상황이 머릿속에서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 내고, 그래서 나는 완곡한 거절의 이유를 찾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미안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했지만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였으면 될 터인데 내 상황을 애써 포장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혹시 전화선 너머로 그런 마음을 벌써 들켜 버린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온 종일 마음이 불편했다.
용기를 내 한 걸음만 내딛으면 될 것 같은데 남겨둔 미련과 닥쳐올 두려움으로 늘 망설인다. 느리고 더디더라도 반드시 봄은 올 거라는 믿음도 늘 경계에서 위태로웠다. 홍수주의보를 알리는 다급한 경보음이 전화기에 떴다가 사라진다. 오늘 밤에는 큰 비가 산을 타고 마을로 넘어 올 것이다. 간신히 핀 꽃잎이 재대로 봄빛을 보지 못한 채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그런 위태로운 봄날의 경계에서 떨림이 있었던 날이라고 읽는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마라. 강물위로 떨어진 불빛처럼…’ 봄밤을 노래했던 김수영의 시 한줄을 기억한다. 봄이 오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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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전 코네티컷 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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