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 대여사이트에서 열흘 동안 빌려 입은 에스키모 점퍼
옷과 한시적 관계를 맺는다는 건 어떤 일일까. 여행지에서의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으로 패션 렌탈 서비스를 이용해 보았다. ‘얼마를 내면 한 달에 몇 벌’하는 식으로 여러 이용방법이 있는 가운데 1회 이용권을 구매했다. 2만5,000원에 한 벌을 빌려 열흘 간 입을 수 있는 서비스다. 옷 가격들이 상당했다. 데님 재킷이 63만원, 블라우스가 52만원, 가방은 평균 100만원 이상. 37만원대 코트가 비교적 싼 축에 속했다.
초보답게 본전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열흘 내내 입으려면 셔츠나 바지는 일단 제외. 원피스와 외투에 집중하던 중 지난 겨울 너무 비싸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던 카키색 점퍼와 비슷한 옷을 발견했다. 소비자가격 233만9,000원이란 말에 망설임 없이 주문 버튼을 눌렀다.
일요일 저녁에 주문한 옷은 화요일 오후 일찍 도착했다. 택배의 기쁨을 아는 이라면 대여 서비스가 잘 맞을 것이다. 입고 나간 첫 날 비가 오기 시작했다. 배상금에 관한 규정이 떠올랐다. 세탁은 업체 부담이지만(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하면 안 된다) 음식물 등으로 인한 오염이 생길 경우 5,000원, 부속품에 손상이 가면 2만원 상당을 배상해야 한다. 노트북을 보호할까 옷을 보호할까, 고민하며 처마 밑을 골라 다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같은 옷을 입었다. 고민이 필요 없어 좋았지만 점점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취재원 중 한 명의 말이 떠올랐다. “일주일 내내 같은 옷 입어도 사람들은 몰라요. 아무도 저 신경 안 써요.” 그래, 우리에게 스티브 잡스의 가호가 있기를.
이용 중 사이트에서 알림 메시지가 왔다. 빌린 옷을 구매하면 40만원대에 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눈이 흔들렸다. 옷은 나무랄 데 없었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할 정도일까. 이미 영원을 약속한 외투들이 옷장에 빼곡했다. 반납일이 임박할 즈음 다시 한 번 메시지가 왔다. 이번엔 30만원대에 주겠다는 거였다. 또다시 흔들렸지만 거듭 생각해도 ‘우리’의 미래에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구석에 놓인 반납용 상자가 여행 트렁크처럼 쓸쓸해 보였다.
마지막 날 혹시 모를 오염을 꼼꼼히 체크한 뒤 옷을 고이 접어 상자에 넣었다. 반납은 따로 신청할 필요 없이 방문한 택배기사에게 전달만 하면 된다. 익숙한 옷장으로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안녕, 인생에서 가장 비쌌던 233만9,000원짜리 점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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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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