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아무도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말해줄게. 누군가 너희에게 이미 알려 주었을 터인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고, 너희는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지내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고 있어. 그렇지만 내 생각은 달라. 너희가 제대로 된 삶을 살려면 올바로 알아야 해. 너희는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될 것이고 중년이 되기도 전에 너희 장기를 기증하고 죽게 되어 있어. 너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그 목적 한가지뿐이야. 한 사람 예외 없이 너희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어. 너희는 머지않아 헤일셤학교를 떠나야 하고, 첫 기증을 위한 준비를 해야 돼. 부디 너희 앞에 어떤 삶이 놓여있는지를 깨닫기 바래.”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에서 루시 선생님이 헤일셤보딩스쿨 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어느 학교, 어느 선생님이 그런 잔인한 사실을 알려줄 수 있을까. 하지만, 루시 선생님은 복제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학생들을 안쓰럽게 여겨 내부고발자 역할을 하며 양심선언을 했다. 그 결과, 학교 관리자들의 심기를 건드려 해고당했다.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설계,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기구한 운명에 관해 열띤 토론도 벌이지 않았고,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머릿속으로만 자신들의 정체와 본분을 기억할 뿐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되돌아보거나 살펴보지 않았다. 운명을 바꾸기 위한 저항도 반항도 없었다. 운명을 피해 달아나지도 않았다.
헤일셤학교 복제 인간 학생들의 삶은 일반 청소년들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나름대로 꿈도 있었고, 친구들과의 우정ㆍ질투ㆍ사랑을 표현하면서 진짜 인간처럼 살았다. 그렇지만 헤일셤학교의 외부 사람들은 복제인간 학생들을 일반인과는 별개의 존재 즉,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했다.
소설의 복제인간 학생과 현실의 학생과의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 앞에 놓인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다고 하더라도 반항, 투쟁하지 않고 순순히 수동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바로 오랫동안 사육과 세뇌를 받았다는 증거다.
만일, 현실에서 루시 선생님이 존재한다면 그녀는 오늘날 학생의 운명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 학교는 이런 곳이다. 생각하는 사람, 취향이 뚜렷한 사람, 색깔 있는 영혼을 지닌 개인을 배출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에 익숙하여 불평 불만 없이 움직이는 로봇과 다름없는 도구를 대량 생산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학교는 너희가 지닌 호기심과 모험심에 관심이 없다.
학교의 목표는 너희들이 말썽 피우지 않고 무사히 졸업하여 다음해에 교육청 혹은 재단으로부터 더 많은 예산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교는 표준화, 획일화를 추구하고 순종하는 학생이 될 수 있도록 너희의 개성을 제거하고 있다.
학교가 요구하는 것을 너희가 착실하게 이행할 때 졸업장이 주어지고, 명문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다. 대학에서도 지속적으로 너희의 개성을 눌러야 사회와 기업이 요구하는 순응자가 될 수 있다. 내가 가장 안쓰러운 것은 너희가 학교과정을 거치면서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안다고 하더라도, 학교ㆍ대학ㆍ직장의 권위에 순종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사육과 세뇌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래서 어쩌라고”로 반응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그런 학교 시스템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고, 반항하지 않는다면 헤일셤에 있는 복제인간과 다른 점이 없다. 부디, 너희 앞에 어떤 삶이 기다리는지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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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엘 홍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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