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벌써 9월 말, 아침저녁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사말도 “올 여름 어떻게 지내십니까” 에서 “올 여름 어땠습니까”로 바뀌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시간이란 개념이 없으면 나이 먹으며 찾아오는 생일, 세월과 계절 따라 피고 지는 산야의 꽃모습에도 별 느낌 이 없을 테니 그렇게 덤덤히 사는 삶이 너무 단조로울 것 같다.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꽃 배달이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부엌에서 아침 준비에 바쁘던 아내가 “애들이 잊지 않고 보냈네” 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때서야 오늘이 아내의 생일임이 생각났다.
미국생활 중 아내 생일을 잊어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교만, 인색, 시기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를 기독교에서 7대 죄악으로 꼽는다. 미국 젊은 부부들 중 남편이 아내 생일을 잊어버리거나 알고도 아무 선물을 안 하면 이는 제 8의 죄악으로 이혼 대상이 된다는 말도 있다.
아내한테 짐짓 알고 있는 척했지만 며칠 전에는 9.11을 잊어버리더니 오늘은 8대 죄를 범한 느낌이다. 건망증? 치매 초기? 아니면 우울 증상의 하나인 무관심? 나 자신이 좀 걱정이 된다.
로마시대 이래 장미는 기독교에서 참회의 꽃으로 전해져 왔다. 오래된 가톨릭 성당의 천장이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장미꽃 문양이 많이 새겨져 있는 까닭이다. 이런 참회의 꽃이 어떻게 여자들 생일 축하용 꽃으로 가장 인기가 높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추측하건데 생리학적으로 꽃의 향기는 여성 호르몬을 자극하여 마음이 편안하고 부드러워지게 하고, 심리학적으로는 꽃과 같이 아름답게 되고 싶은 욕망의 동일화((Identification)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아이들이 보내온 것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꽃이자 나이 든 사람의 생일 꽃인 흰 장미 다발이었다.
꽃은 겉으로 보면 아름답고 향기로움을 뽐낸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절박한 종족유지와 처절한 희생정신이 깃들어있는 생식 장기다. 어떻게든 벌과 나비를 끌어들이고 바람을 잘 이용하여 좋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스스로는 소멸하면서 종족의 연장을 꾀한다.
흰 장미를 들여다보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보다 더 고귀하고 행복한 삶은 없다” 는 톨스토이의 독백을 음미해 본다.
창조주가 만들었든 우연한 결과이든 생일은 우리가 태어난 날이다. 특별한 날이니 축하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생일은 아주 좋은 날이지만 사람에 따라 괴롭고, 안타깝고, 언짢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기도 하다. 생일을 모른다고 심한 부부싸움을 한 후 헤어진 중년 남자, 손자 손녀들의 생일이 닥쳐오면 정신증상이 심해지던 가난한 노인들, 꽃을 사들고 온 딸을 향해 남편을 빼앗아가려는 화냥년이라 소리치던 치매 노인, 하필 자신의 생일을 택해 자살기도를 했던 젊은 우울증 환자 등등이 내 머리 속을 스쳐간다.
있다 없어짐은 우주의 법칙이요 인생살이의 경험이다. 생일, 꽃, 여름, 명예와 돈, 모든 게 그렇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한번뿐인 인생과 주어진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겠다.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불경이고 자신에 대한 학대이다.
지나가버린 여름과 나를 위해 뭔가 해보고 싶다. 이글을 마치고 나면 바로 인근 커뮤니티 대학의 수화 클래스에 등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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