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맨하탄 뉴욕주법원의 한 판사로부터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한 치매 환자의 법적후견인 임명 소송 사건을 재판하고 있는데 법원심사관을 맡아 줄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부랴부랴 스케줄을 조정한 후 판사 서기에게 임명을 수락하겠다고 통보하고 소송 기록을 넘겨받아 검토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의 환자는 한인 할머니였다.
치매가 발병하면 문제들이 점진적으로 발생한다. 어마어마한 요양원 비용도 해결해야 하지만, 판단력 상실로 인한 부적절한 경비 지출과 어처구니없는 재산 관리로 환자의 총재산은 종종 탕진될 위험에 처한다. 은행 기록과 돈은 분산되고 잡동사니 쓰레기 산더미와 뒤섞이기 일쑤다.
전기요금 체납으로 단전사태가 나기도 하고, 아파트 관리비 미납으로 차압 집행영장이 날아오기도 한다. 심지어 환자들을 노리는 파렴치한 사기꾼의 유혹에 넘어가 수십만 달러의 은퇴 비상금이 날아가기도 한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재정 상태는 엉망진창이 된다. 한인 할머니의 케이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상대로, 내야 하는 집안 경비들은 지불되지 않고 있었고, 내서는 안 되는 경비에 돈을 술술 쓰고 계셨다.
이 때문에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치매, 뇌졸중 및 노환 환자들을 위한 성년후견제도가 있다. 사고 능력을 상실했거나, 사고로 장애가 발생했거나, 노환으로 인해 돈 관리를 하지 못하면, 법원을 통해 배우자, 자녀 또는 믿을 만한 사람이 후견인으로 임명된다.
후견인은 재산 관리권 및 신상결정권한을 대신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부여받는다. 또한 중산층 환자의 경우, 집이나 재산을 잃지 않으면서 메디케이드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판사의 승인도 요청할 수 있다. 메디케이드 수혜 및 집과 중산층 수준의 재산을 보호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치매 환자 성년 후견 소송 사건은 쉽지 않다. 환자에게 직접 물어 사실 확인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후견인이 되겠다고 나선 신청인이 정직한 사람인지 심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부모의 재산을 서로 관리하겠다며 자녀들이 낯 뜨거운 다툼을 벌이기까지 하면 사건은 꼬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갈수록 늘어나는 재판 업무량과 씨름하는 법관이 직접 조사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판사는 대타를 지명한다. 공인 법원심사관은 판사의 눈과 귀가 되어 판사를 대신해 사실 관계를 세밀히 조사한다.
법원심사관은 환자, 가족, 친척, 간호인, 신청인 및 주변 인물들을 만나 조사하고, 관련된 의료, 재정 기록을 검토한 후 판결 추천 및 분석보고서를 법정 출석 일에 구두 및 서문으로 판사에게 제출한다. 특히 환자들의 경우, 노인 학대의 피해자가 되거나 재산을 빼앗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오랜 세월 연락이 끊겼던 자식이나 먼 친척이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하면 심사는 강화된다.
재산에 눈독 들이는 자를 후견인으로 세우면, 나중에 생선을 다 먹어버린 고양이에게 생선 토해내라고 해야 하는 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산전수전 다 겪으신 다른 법원 한 판사는 심지어 아내가 후견인을 자청한 경우에도 혹시나 병든 남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재산 챙겨 도망갈까 우려하기도 하셨다. 그래서 신청인의 전과 기록, 파산 경력, 환자를 이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 그리고 환자의 숨겨진 재산도 모두 조사 대상이다.
이처럼 후견인 임명 소송은 골치를 아프게 한다.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여 법원 절차를 모두 밟아야 하므로 배우자와 자녀들은 고생을 한다. 그래서 이런 사건들을 접할 때면 항상 “법정을 피할 수 있도록 건강하셨을 때 배우자나 착한 사람을 법적 대리인으로 미리 임명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까”하는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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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양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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