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엄수흠 뉴욕한인의류산업협회 회장 · 뉴욕한인직능단체장 협의회 전 의장
보따리 장사하며 고된 시간 보낸 파라과이 삶
가정의 소중함과 현재 사는데 큰 발판 돼
협회 수장으로 봉사 앞장·한인사회 발전 노력
그의 삶은 한마디로 고진감래 (苦盡甘來)다. 젊은 시절 파란만장한 고생(苦生)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참고 버티며 미래를 기약했다. 그렇게 힘든 일을 격은 뒤에 좋은 일이 찾아왔다. 이젠 남부럽지 않고 부족함 없이 성실한 가장으로 살고 있다. 교회에선 장로로, 협회에선 회장으로 봉사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직능단체장 모임의 수장을 역임하는 등 한인사회의 발전에 앞장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엄수흠(62) 뉴욕한인의류산업협회 회장 & 뉴욕한인 직능단체장 협의회 전 의장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그는 1955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5남2녀의 막내. 학창시절은 고향에서 보냈다. 막내라 옷과 책 등은 형과 누나가 쓰던 것을 물려받았다. 찰흙으로 만든 구슬치기와 신문이나 잡지로 접은 딱지치기를 하며 놀았다. 지고 못사는 성격이라 딱지가 집안에 가득했다. 겨울에는 논밭에서 불장난을 했다. 망우리 돌리다 바지에 구멍을 내기 일쑤. 개구쟁이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학창시절 체격은 중간정도로 육상 단거리 선수였다. 중학교 때는 배구선수로도 활동했다. 숫자에 밝아 산수를 좋아했다. 주산을 배우며 암산 실력도 그 때 쌓았다.
그는 직업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서울 형네 집에서 기거하며 직장에 취직했다. 양복점에서 일하며 양복과 양장의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쌓은 기술로 1979년 수유리에 양복점을 냈다. 그 때 의류계통의 인연이 지금까지 40여 년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1978년 패션계통에서 일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약 3년 동안 연애를 했다. 빼어난 외모, 명랑한 성격에 생활력이 강한 매력 등에 빠져 1980년 결혼했다. 그 후 큰 아들(82년 생)도 낳고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복점의 고객이자 형처럼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파라과이 이주 권유를 받았다. 1985년 아내, 아들과 함께 파라과이로 이주했다. ‘희망의 앞날’을 기약하며 새로운 삶에 도전장은 내민 것이다. 그는 “양복점을 가정을 꾸미고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었지만 보다 행복한 삶을 찾아 파라과이로 이주를 결심했다”고 옛 일을 떠올린다.
■파란만장한 파라과이의 삶
그가 이주한 파라과이는 생각과는 딴판이었다. 언어와 풍습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말도 안 통했지만 아내와 원주민 가정을 방문하며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일명 ‘밴데(Bende)’로서 옷, 운동화, 전자제품 등 생활용품을 팔러 다녔다. 처음 6개월은 차도 없어 걸어 다녀야 했다. 차를 구입해 장사를 다닐 때는 자동차가 너무 뜨거워 팔뚝에 화상을 입기 일쑤였다. 자동차가 고물(?)이라 말썽을 부릴 때마다 아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뒤에서 밀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지금도 파라과이 생활을 떠올리면 ’장사하면서 고생한 기억 뿐‘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런 고생 속에서 ‘성실한 생활을 하면 신뢰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스페니쉬 공부를 위해 학원을 다녀야 했다. 그런 성실한 삶을 지켜보던 지인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물건과 자동차 구입 때 선뜻 보증을 서 주었다. 원주민들의 배려로 ‘베푸는 삶’도 깨달았다. 파라과이는 너무 더운 나라라 낮12시부터 3시까지는 쉬는 시간이다. 원주민들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망고나무 그늘에서 잘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 수박 등도 선뜻 건네주었다. 그런 원주민들의 배려를 못 잊어 그곳을 방문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장사하면서 해프닝도 많았다. 집처럼 생긴 공동묘지를 사람 사는 집으로 착각해 물건을 팔려가기도 했다. 아무리 두드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공동묘지라 알려줄 때까지. 그런 고생을 했지만 언어와 풍습을 빨리 배울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1988년 둘 째 아들이 그 곳에서 태어났다. 아내와 함께 두 아들을 키우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것도 그 때다.
보따리 장사로 정착을 한 뒤 봉제공장에서 하청을 받아 가정에서 봉제를 시작했다. 양복점 재단사의 실력으로 양복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6년여 동안 봉제업을 하다가 1991년 뉴욕으로 옮겼다. 파라과이 이주를 권유했던 가족처럼 지내던 천창득씨가 또 다시 미국의 취업이민을 알선해 준 것. 파라과이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은 것도 한 몫했다.
그는 ‘보따리 장사가 너무 힘들어 내가 이곳에 왜왔나 후회도 하고 귀가 잘 안 들리는 그야말로 ’귀가 막히는‘ 체험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고생스럽긴 했지만 가정의 소중함과 현재의 삶에 큰 발판이 됐다“고 귀띔한다.
■종업원의 주인의식
그는 1991년 가족과 함께 뉴욕에 왔다. 우드사이드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맨하탄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경험을 쌓고 저축을 해서 1996년에는 봉제공장을 직접 운영했다. 초기에는 저가 의류를 취급하는 도매상들을 상대로 영업했다. 그러다 유명브랜드 취급에 주력했다. 고가시장으로 눈을 돌려 랄프 로렌, 캘빈 클라인, 타하리, JC 페니 등 고급 브랜드 회사에 제품을 납품했다.
현재는 납품계약을 맺은 세계적인 브랜드 ‘티어리(Theory)'사의 자켓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유명브랜드 취급과 업계의 트랜드를 정확히 읽어내는 ’이길 수 있는 시장‘을 겨냥한 경영전략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성공한 장수업체로 생존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장수업체의 비결을 신뢰를 쌓는 것과 종업원들이 주인의식을 갖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종업원들이 내가 만든 제품을 내가 입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쏟아 일하도록 했다. 비즈니스는 남이 돈을 벌여주는 것이니 만큼 인력관리가 중요하고 품질의 향상은 종업원이 주인의식을 갖고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는 “현재 60여 명의 종업원 중 97%는 남미와 중국 등 외국인이다. 그 중 5명 정도가 창립멤버고 나머지도 10년-15년 정도의 장수직원이다. 그들이 오래 일하는 이유는 가족처럼 지내며 남미생활을 통한 언어와 풍습 등을 토대로 종업원들과 소통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참의식이 중요하다
그는 한인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다. 봉제공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뉴욕한인의류산업협회와 인연을 맺었다. 1990년대 중반 1,000여명이 참여하는 봉제인의 밤 행사에 참여한 뒤 협회활동에 동참했다. 협회 골프모임의 회장, 장학위원장, 이사장 등도 역임했다. 지난해부터는 제21대 회장으로 추대돼 임기를 시작했다.
전임회장들의 사업을 이어받아 내실 있게 이루어 나가고 있다. 한국의류산업협회와 업무교류를 위한 MOU를 체결한 것은 보람으로 생각한다. 불경기로 뉴욕코리안 패션페스티벌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재정적 확보가 미흡한 상황은 아쉬움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임대료와 최저임금 인상으로 어려운 과정에 처한 회원사들이 더욱 단합해 교류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2016년 한 해 동안 직능단체협의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세탁과 네일 협회에 대한 주정부의 규제강화와 단속대비에 힘을 쏟았다. 노동법 세미나를 지원하고 주정부와의 로비활동도 전개했다. 뉴욕한인회 분열사태 대처에도 적극 나섰다. 한인회관 살리기 캠페인 모금에도 앞장섰다. 한인사회의 분열된 문제를 단합된 모습으로 가꾸고자 노력한 것이다.
임기를 마치면서 변호사, 의사, 변호사 협회 등 보다 전문적인 한인단체들도 협의회 활동에 많이 참여하여 다 함께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잊지 않는다.
그는 “한인회를 비롯한 한인단체에 경험이 많고 재정적 여유도 있으면서 리더십이 강한 사람이 회장을 맡으면 한인사회 발전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한인 모두가 자신이 속한 곳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적극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동참의식을 강조한다.
■한인사회에 기여하고파
그는 ‘성실한 삶’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실’이 가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아들 둘에게는 근면하면서 성실한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처음 갔던 그는 지금까지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2011년에는 뉴욕효신장로교회 시무장로로 임직했다. 교회봉사와 선교활동도 열심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선교활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골프 핸디 12에 테니스 실력도 뛰어난 그의 건강비결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밝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현재 사는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며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뜻 있는 일을 하면서 보람 있게 사는 것을 ‘참 인생’이라 생각한다.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아내라는 그는 “아내는 자신이 공주처럼 살고 싶어서 나를 왕자처럼 만들려고 항상 믿고 따르려고 노력한다”며 아내사랑을 자랑(?)한다.
남은 인생에 대한 계획으로 “그동안 한인사회에서 각종 활동을 하면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토대로 앞으로는 더욱 한인사회와 교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극 나설 것”이라는 그의 모습에서 한인사회를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
연창흠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