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세대, 아득하기만 하다. 그 까마득한 세월 저편에 우리들의 피 끓는 청춘들이 있었다. ‘그릇됨’을 향해 울분과 분노를 토해내던 터질 듯한 가슴들, ‘옮음’을 위해 나도 죽으리라, 두 주먹을 불끈 마주잡았던 순간들… 그랬었다, 우리들 젊은 날은 그렇게 핏빛으로 물든 아픈 흔적들을 기억의 깊은 골에 켜켜이 새겨두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 지금은 낡고 잊혀진 이름이지만 그때는 세상 고뇌를 다 짊어진 듯한 우리들의 감성과 정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창이자 분출구가 있었다. 바로 음악 감상실이다. 우리들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강의실을 뛰쳐나와 음악 감상실로 향했다.
쓴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터질 듯한 스테레오 음향과 함께 어둑한 음악실 안에 죽치고 시간을 죽이는 일이야말로 쿨~한 젊은이의 상징 같았다. 그곳엔 팝뮤직, 샹송, 포크송, 그리고 히피풍의 트위스트가 있었다.
세시봉, 디쉐네, 시보네, 아카데미, 뉴 월드, 카네기 등등. 그리고 70년 중반에 생맥주를 곁들인 쉘브르와 명동의 돌체 다방(문학도들의 아지트?) 등, 이름도 아스름한 음악감상실은 서울 장안 어디든 산재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방과 찻집, 심지어는 경양식 집까지 음악감상실 분위기로 꾸미지 않으면 영업이 안 될 지경이었다. 그 중에는 화신백화점 종로통에 인기 최고였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를 빼 놓을 수가 없다.
세시봉은 특별 이벤트가 많았다. 당시를 풍미했던 통 기타 가수들이 세시봉을 통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가요계를 휩쓸었다. 조영남과 송창식을 비롯해 지금의 ‘아이돌’ 그룹 같은 ‘트윈 폴리오’가 탄생한 곳도 세시봉이었다. 아무튼 당시의 멜랑콜리한 화음들을 유행시킨 장소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군복을 염색해 입고 장발에 청 나팔바지를, 여자들은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수입한 미니스커트를 받쳐 입고 트위스트 곡에 맞춰 몸을 흔들었던 통기타와 록 뮤직의 산실이었다.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는 빗겨갈 수가 없다. 겨울이 짙어가는 회색빛 그 날이었다. 잊을 수 없는 그 첫날,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폭풍같이 밀려드는 바이올린 음향에 숨이 막혔다. 움직일 수 없었다. 찢어질듯 절정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높은 곳으로 날았다가 불꽃을 튀기며 빠르게 추락하는 그 매혹적인 바이올린 음률에 미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 곡은 바로 ‘사라사테’의 ‘지고네르바이젠’ 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르네상스의 ‘죽순이’가 되었고 평생을 바이올린 소리에 사로잡히는 바이올린 마니아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 그 추억의 장소를 떠올리면 가슴이 거침없이 쿵쿵 두근거려 온다. 그런데 한줄기 회한이 설핏 스쳐지나가는 건 무엇일까. 우리의 청춘은 그토록 사대주의를 등에 업은 채 ‘서구문명’ 지향성 해바라기들이 아니었나 하는 회한 말이다.
어둠에 묻힌 짙푸른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거기 누구 없어요? 세시봉~르네상스 친구들!”
파스텔 톤의 음성으로 가만가만 투명한 추억을 불러본다. 어디선가 사라사테의 바이올린 소리가 에코처럼 귓가를 맴돌아 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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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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