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웨스트 박사는 내가 대학원에서 약물학(Pharmacology)을 전공할 때 학과장이었다. 명석한 두뇌의 훌륭한 학자였지만, 너무 마음이 양순해서 행정면에서는 힘들어 했다고 들었다.
그분과의 좀 특별한 인연은 입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입학 면접을 이분이 했는데, 워낙 대학교 때 성적이 나빠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낙심한 채 다른 학교를 알아보던 중 입학 마감 하루 전에 입학허가 받은 학생이 거절통지를 해 왔다고 해서 나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서둘러 다시 모든 서류를 구비해 다음날 이분과 약속시간에 맞춰 가는 중 자동차 바퀴가 펑크가 나서 진땀을 흘린 기억이 난다. 모처럼 기회가 다시 왔는데, 약속시간을 못 지키는 게 상당히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대학원 공부가 시작되었는데, 이 분은 내가 외국태생(그때는 영주권자였음)의 가난한 학생인 것을 알고 국립보건원에서 대학원생에게 주는 생활보조비(Pre-Doctoral stipend)를 타도록 주선해 주셨다. 1978년부터 세금 없이 한 달에 500달러 씩 지급 받았으니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다.
모든 학과과정을 이수하고 박사학위를 위한 연구를 하던 중 건강이 나빠지고 연구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분을 찾아가 아무래도 학교를 그만두고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말했더니 펄쩍 뛰면서 말렸다. 이제 모든 학과를 우수하게 마치고, 제일 힘든 과정을 넘겼으니 조금만 더 하면 될텐 데 하면서 적극 만류하여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다.
학교 다니던 동안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그냥 인사차 말씀을 드렸는데, 놀랍게도 어머님 고별예배 때 바쁜 이분이 전혀 사전연락도 없이 오셔서 나를 퍽이나 감동시켰다. 이 일로 이분의 인품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학위를 받고 대학을 떠난 후에는 몇 번 학교 세미나에 참석해서 뵈었고 그 후 은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난달에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향년 92세, 고별예배 장소가 2시간 이상 떨어진 리치몬드 근처이고, 오랫동안 뵙지도 못했지만 꼭 참석해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에 따라 먼 길을 아내와 운전해서 갔다.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였는데, 예상대로 조문객중 동양인은 우리 부부 뿐이었다. 목사님은 이 분의 신실한 믿음의 삶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빛 가운데 행하는 삶,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한 삶,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분의 삶을 표현했다. 과학에만 은사를 쓴 것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열심이었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90이 넘은 연세에 찬양대에서 봉사하셨다고 한다. 고별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목사님에게 어머님 고별예배 때 이분이 예상치 않게 오셨다고 했더니 “글쎄 그분이 그렇다”며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참으로 인생을 열심히, 멋지게 사시고 떠난 분이란 생각에 돌아오는 내내 그분에 대한 경외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내 가슴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참 본받고 싶은 삶을 사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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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효 FDA 약품 심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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