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진앙지 시리아와 인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여기에 지중해 건어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난민까지 가세하여 EU국가 간에도 수용 여부와 배분을 놓고 불화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정부는 최근 동남아시아에서 소수의 난민을 데려오겠다는 정책을 밝히고 있는데 규모를 볼 때 대외 체면을 세우려는 제스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은 전 국민 대부분이 난민이었고 세계 각 나라의 원조와 지원으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제 경제 강국이 된 한국은 과거를 생각해서라도 난민문제에 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때이다.
한국은 탈북난민을 포함, 한국에 살거나 일하려고 찾아온 저개발국 외국인과 근로자들을 홀대하거나 차별하지 말고 자국민과 동일하게 포용해 주어야 한다. 끼리끼리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은 후진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돼지근성이다.
1950년 12월, 유엔군과 국군은 괴멸상태에 이른 북한군을 한중 국경까지 밀어 붙여 거의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돌연 참전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전선은 남으로 후퇴하여 서울이 또 다시 공산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빠졌다.
우리 가족은 서둘러 피난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토록 서두른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 막 터졌을 때 정부의 말만 믿고 있다가 적 치하에서 3개월을 보냈다. 그 동안 아버지가 납북되었고 비축된 식량이 떨어져 죽조차 변변히 못 먹어 모든 가족은 영양실조 상태에 놓였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에는 밤마다 날아오는 포탄에 생명이 위태로웠고 더구나 반동분자 가족을 색출해 처형한다는 소식에 매일 이 집 저 집 도망 다니며 구명도생하는 절박한 시기를 보내야 했었다.
전황이 점차 악화하자 외할머니는 남자들만이라도 살아야 된다며 형과 나를 데리고 이모가 살고 있는 전북 삼례라는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 어머니는 두 여동생과 함께 서울에 남아 있다가 여의치 않으면 뒤따라오기로 하였다.
한강다리가 모두 끊겨진 터라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노량진에 다다랐다. 거기서 철길을 따라 걸어서 영등포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기차를 타려는 난민들로 도떼기시장 같았다. 기차는 모두가 화물칸이어서 짐처럼 탈 수 있는 데까지 모두 태웠다. 화물칸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우리는 다행히 화물칸 안에 자리를 잡았고 드디어 기차는 밤늦게 출발하였다. 기차는 모든 역마다 머물렀다. 누구도 운행시간이 어떤지 얼마동안 서있는지 몰랐다. 알아서 내리고 타고 하였다. 가다가 넓은 들녘을 지날 때면 용변을 해결하라는 듯 한동안 정차하였다.
다음날 늦게 우리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1· 4후퇴 때 피난 온 나머지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전국 곳곳은 북한에서 내려온 난민들로 넘쳐났다. 우리 가족은 2년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밤마다 멀리 북쪽에서 포성이 들려왔다. 9개월 후인 1953년 7월27일 마침내 3년을 끌던 한국전은 휴전을 맞았다.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은 여전히 이산가족이 많이 있고 새로운 난민이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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