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섹스 화장실
한동안 아파트단지 산책로에서 요상한 이웃사촌과 자주 조우했었다. 뒤에서 보면 분명히 치마 입은 장발의 여자인데 앞에서 보면 까만 턱수염이 덥수룩한 중년남자였다. 카메라로 하늘을 연신 찍어댔다. 아내는 그의 행태가 여성답다며 여자라고 했고, 나는 그의 넓은 어깨를 들어 남자라고 우기다가 정신질환이 있는 성전환자일 것이라는 결론에 합의했었다.
늘 혼자 뒤뚱뒤뚱 걸으며 조그만 카메라로 광대한 하늘을 찍는 그가 신기했다. 내 눈엔 안 보이는 하나님이나 UFO가 그에겐 보이는지 의아했다.
마켓에도 그런 모습으로 가는지, 속옷은 남녀용 중 어느 것을 입는지, 머리는 이발소와 미장원 중 어디서 깎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화장실은 남녀용 중 어느 곳을 사용하는지 아리송했다.
이사 간 듯 요즘엔 보이지 않는 그에게 굿 뉴스가 생겼다. 뉴욕, LA, 워싱턴DC 등 다른 대도시처럼 시애틀도 정부기관은 물론 모든 민간업소들의 1인용 화장실을 남녀성별 구분 없이 ‘통폐합’하도록 조례로 정했다. 이제부터는 화장실 문의 ‘Men,’ ‘Women,’ ‘♀,’ ‘♂’ 따위 표시가 ‘Restroom,’ ‘Unisex Restroom’ 또는 ‘All-Gender Restroom’ 등으로 바뀐다.
성전환자들에겐 공공장소의 화장실이 지옥과 진배없다. 여성용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성전환 여성은 따가운 눈총을 받기 일쑤다. 여장 남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자 옷차림으로 남자용 화장실에 갈 수도 없다. 성전환 남성도 남자 화장실에 가면 정신병자 여자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이런 불편과 모욕이 남녀화장실 통폐합으로 쉽게 해소된다는 얘기다.
원래 화장실은 남녀공용이었다. 남녀용 화장실을 따로 갖춘 가정집은 없다. 비행기나 기차의 화장실은 처음부터 유니섹스였다. 미국 직장에 여자 화장실이 따로 생긴 건 여성 근로자들이 크게 늘어난 19세기 후반부터였다. 매사추세츠 주가 전국 최초로 1887년 여성 화장실 설치 의무화법을 제정한 후 거의 모든 주정부가 1920년대까지 비슷한 법을 시행했다.
덕분에 미국 여성들은 투표권보다도 화장실 사용 평등권을 먼저 향유했다. 하지만 화장실의 성별 구분은 애당초 또 다른 차별을 잉태했다. 남녀 어느쪽에도 서먹한 그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를 총칭하는 소위 ‘LGBT’이다. 이들뿐 아니라 자신의 성 정체성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르는 성모호자들도 속속 존재감을 드러냈다.
LGBT 그룹은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만인평등 인권운동을 상기시키며 모든 국민은 공공 화장실을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자유롭고, 안전하고, 공평하게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국을 무대로 남녀구분 화장실 철폐운동을 벌이며 시애틀을 비롯한 상당 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일부 대학들은 이미 화장실을 남녀공용으로 개조했다.
역대 최초로 동성결혼을 공개 지지한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에 유니섹스 화장실을 최초로 설치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는 LGBT 인권존중의 표상으로 지난 4월 백악관 부속 아이젠하워 행정빌딩에 유니섹스 화장실을 개설했다. 남녀구분 화장실 개념이 없는 중국, 인도, 가나 등 개발도상국들과 똑같은, 19세기 화장실 문화로의 회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남녀공용 화장실의 취지가 꼭 성전환자들만 위한 것은 아니다. 딸아이의 용변을 돕는 아빠나 아들아이를 동반한 엄마도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영화관, 쇼핑몰, 공항 등엔 이미 ‘가족 화장실’이 따로 마련돼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크게 늘어나는 휠체어 의존 노인들에게도 편리하다. 그들의 간병인이 남자든, 여자든 화장실에 함께 들어갈 수 있다.
유니섹스는 트렌드다. 유니폼과 스포츠의류는 물론 청바지와 티셔츠에도 유니섹스가 많다. 일류 디자이너들의 최신패션도 남녀 패턴이 엇비슷하다. 심지어 이름도 그렇다. Chris, Jay, Lou, Mel, Nat, Pat, Sam 등은 유니섹스 이름이다. 모든 면에서 미국을 앞질러가는 한국에 유니섹스 화장실뿐만 아니라 유니섹스 공중목욕탕이 등장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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