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 색 타월이라니... 이런 색 타월도 있었나. 이슬 머금은 도라지꽃 색이라 눈이 시원했다. 많이 낡았으나 단정하게 접혀져 있었다.
딸네 집 벽장에 먼지 한 톨 들어갈 틈이 없이 꽉꽉 눌러 박힌 타월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아직도 가격표를 달고 있는 것, 한 두어 번쯤 빤 듯한 것, 수년을 써서 흐늘흐늘한 것, 크고 작은 것들로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두 팔을 벌려 안을 수도 없는 큰 사이즈로 무려 네 박스나 쏟아져 나왔으니 좀 지나치다 싶었다.
식구 넷에 왜 이렇게 많은 타월이 필요한 것인지 내심 흉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건 내 딸이 나에게 배운 바로 내 모습인데, 자신을 모르고 흉이나 보며 반성할 줄 모르는 내 속마음을 누구에게 들키지나 않았는지 가슴이 퉁퉁거렸다.
그 속에는 우리 집에서 묻어온 것들도 더러 있었다. 아마 애들을 감싸오느라 가지고 오게 되었을 것이다. 빨고 빨아서 섬유는 낡았고 모양은 변했어도 거기에 배어 있는 수많은 기억들은 정겨운 해후로, 추억의 조각으로,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 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산뜻한 보라색 타월 귀퉁이에 하얀 실로 KIM 이라고 수놓아진 부분을 움켜쥐고 한참을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찌릿한 감동으로 유년기의 사위 얼굴이 떠올랐다. 사위가 김씨이니 어린 시절 캠프라도 가게 됐을 때 찾기 쉽도록 배려한 사부인의 정성이었으리라. 아들을 위한 간절한 모정이 진솔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그 수건을 매만지면서 내 딸의 어린 날까지 되새기며 다시 곱게 접어서 다른 타월 속에 깊이 묻었다. 아들을 위한 엄마의 정성이 그 박스 안에 있는 다른 타월에까지 전파되기를 빌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오고 갔어도 어머니의 사랑만은 꼭 그 자리에 질기게 살아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 곁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계신다. 늙을 줄 모르는 태양처럼 모성애는 구원하다. 너희들은 나의 분신이라고 자기 속살을 파 먹이는 우렁이처럼 자식을 품에 안고 기나 긴 인생 여정을 걷는 어머니들, 모성애는 색이 바랄 줄도 모르고 형상이 바뀔 줄도 모르고 부피가 줄어들 줄도 모른다.
가족의 체취를 심장으로 느낄 수 있는 타월에서 잊고 싶지 않은 지난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용했던 사람들의 그리운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 맞은 듯 흘린 땀, 온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 쓴 몸을 물로 씻은 후 마지막 정리를 해주고 기분 좋게 감싸주는 타월은 정직한 노동으로 자신은 날마다 삭아가지만 새롭게 맞이할 우리의 다음날을 준비해 준다. 타월이야 말로 피로를 덜어주고 달큼한 휴식을 주는 형이하학적 사랑이다. 주부들이 질감 좋고 흡수력 좋은 무명타월을 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타월의 비밀을 터득한 아낙네들이 어찌 예쁘고 질 좋은 타월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타월은 수선스럽지 않은 노력으로 숙명을 아끼며 소명을 다 한다. 화려하고 기품 있는 옷이 되지 못함을 탓하지 않고 자기 역할이 초라하다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타월은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라서 부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선물이 될 수 있음이 좋다. 선망의 시선을 받아 본 일도 없는 평범한 생활용품으로 만족한다. 자신을 특별한 관심으로 대해주든 말든 초연하며 필요불가결한 용품으로 묵묵히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는 타월 같은 사람이라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는지.
낡은 타월은 나에게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짧은 글로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낡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것보다 큰 의미가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 낡아가고 낡은 것은 또 다른 새로움을 잉태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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