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가 전신
▶ 한국학교 후원·세미나 등 다양한 사업
[한인사회 기관·단체 역사탐방 - LA 한인상공회의소]
LA 한인상공회의소(이하 상의)는 한인사회 경제계를 대표하는 봉사단체로서 43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동안 ‘아메리칸 드림’을 거머쥔 한인 경제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1971년부터 회장을 맡으며 한인 상공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한인 커뮤니티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의 또한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때론 화합하고, 때론 갈라지는 모습을 보이며 성장해 왔다. 상의가 성장해온 과정을 정리해 본다.
■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가 모태
상의는 43년 전인 1971년 탄생했다. 그 당시 LA의 한인인구는 수천명에 불과했고 오렌지카운티와 샌디에고 카운티를 다 합쳐도 1만명이 넘지 않았다. 그래서 ‘남가주 내 한인 경제인들을 한데로 묶자’는 취지에서 조지 최, 소니아 석, 김시면씨 등 올드타이머 30여명이 1971년 3월 LA 다운타운의 한 호텔에서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 창립을 위한 발기인대회를 열고 같은 해 6월 열린 1차 총회에서 부동산업에 종사하던 조지 최씨를 초대회장으로 선출,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를 출범시켰다.
1970년대 초반 한인 경제는 무역 및 가발업에 종사하던 한인들이 주름잡았다. 또한 부동산업은 시험을 보지 않고도 가주 정부에 신청만 하면 라이선스를 발급해 주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초창기 한인 이민자 중 부동산업 종사자가 많았다.
조지 최 회장이 1972년 LA 한인회장에 당선되면서 이용(작고)씨가 1973년 2대 회장에 취임했다. 3대 회장에는 가발업을 하던 이학조씨가 1974년 취임했는데 3대 상의가 출범했을 당시 사무처는 올림픽 블러버드와 알바라도 스트릿 인근 한 건물 안에 있었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상의에는 4대 회장이 없다는 점이다. 1974년 상의에 입문, 지금도 이사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한군석 전 회장은 “숫자 4는 ‘죽을 사’자가 떠오른다고 해서 3대에서 5대로 건너뛴 것 같다”고 말했다. 1976년 5대 윤병욱 회장은 상의 역사상 최초로 경선을 통해 회장으로 당선됐다.
무역업에 종사하던 윤 회장은 당시 상의 내 ‘뉴 그룹’의 리더로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고 투표에 참여한 31명의 이사 중 16표를 얻어 상대후보를 단 한 표차로 누르고 상의 수장자리에 올랐다.
이어 6대 회장은 한국마켓을 운영하던 이정수씨, 7대 회장은 치과의사 장기열씨, 8대 회장은 올림픽 마켓을 운영하던 문창배씨, 9대 회장은 봉제업에 종사하던 양효길씨, 10대 회장은 무역업에 종사하던 이청광씨가 각각 선출돼 큰 탈 없이 상의를 이끌었다. 9대 회장까지는 회장 임기가 2년이었으나 10대부터 1년을 일하고 한 번 더 연임할 수 있도록 정관이 바뀌었다.
■ 초창기에도 왕성한 활동
초창기와 정착기인 1970~1980년대에도 상의는 지금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했다. 70년대부터 단체 살림전반을 책임지는 사무국(현 사무처)을 운영했고 이사회 및 총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또한 부동산 및 융자 세미나, 한국학교 기금모금 캠페인, 한인 경제인 모국 방문, 저소득층 학생 대상 장학금 수여식, 해외 도시와 자매결연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당시 상의는 일본 오사카를 방문, 미국 투자세미나를 열고 오사카 소재 한인상공회의소와 상호협력을 위한 자매결연을 체결하기도 했다.
윤병욱 5대 회장 당시 경향신문 기자 출신인 윤 회장과 서울신문 기자 출신인 한군석 부회장은 상의 소식지나 다름없는 ‘남가주 상공회보’를 발간했고 이후 한인 이민자들의 미국생활 길잡이 역할을 한 ‘미국 생활정보’ 책자를 발행, 한인 커뮤니티 일대에 배포했다.
■ 88 서울올림픽 때 로즈퍼레이드 꽃차 출품
1987년 11대 회장에 취임한 한군석씨는 상의 내에서 ‘상의 역사의 산 증인’으로 통한다. 지난 40년동안 상의와 함께 숨 쉬며 생활해 왔다.
한 전 회장은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상의 이름이 들어간 꽃차를 패사니다 로즈 퍼레이드에 출품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당시 30만달러 정도의 예산을 잡고 꽃차 사업을 추진했는데 최종적으로는 26만달러가 들었다.
그 당시 이 정도 규모면 꽤 큰 사업이었는데 상의는 처음 대한항공에 예산의 일부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결국 한국 올림픽조직위원회에 도움을 요청, 6만달러를 받아냈다. 그리고 나머지 20만달러는 상의 이사 및 커뮤니티로부터 거두었다. 역시 치과의사 출신인 12대 이영송 회장 시절에는 상의 회원과 비회원 3~4명 등 총 18명의 한인 경제인들이 평양을 방문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센추리가구점을 운영하던 13대 방미철 회장, 건축업에 종사하던 14대 이용기 회장, 역시 건축업에 몸담던 15대 강득휘 회장, 16~17대 하기환 회장, 18대 정인철 회장, 19~20대 김상호 회장, 21~22대 강상윤 회장, 23~24대 김성주 회장, 25대 최명진 회장 등이 상의 리더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 최근 들어 선거 후유증 극심
2002~2004년 의사 출신 26대 이용태, 변호사인 27대 에리카 김씨가 회장을 맡으면서 상의 주인이 이민 1세대에서 1.5세대로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에리카 김씨는 상의 역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28대 한문식, 29대 신구현, 30대 정주현, 31대 이창엽 회장이 각각 상의를 이끌었다.
30대 정주현 회장의 경우 그동안 이사회 중심으로 운영되던 상의를 분과위원회 중심으로 운영하는 체제 개편을 적극적으로 추진,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2대 스테판 하 회장은 26년 만에 처음 실시된 경선을 통해 회장에 당선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59명의 이사들이 참여한 선거에서 하 회장은 로텍스 호텔을 운영하던 최라나 후보를 4표차로 아슬아슬하게 눌렀다.
33~36대는 명원식, 김춘식, 에드워드 구, 임우성씨가 각각 회장을 맡았다. 32대 이후 5년 만에 치열한 경선을 통해 37대 회장에 선출된 케니 박 회장의 경우 회장과 이사장 경선을 연달아 치러 취임 후 1년간 선거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박 회장 당시 ‘미주 한인경제 40년사’ 책자를 발간하는 사업이 추진됐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중간에서 흐지부지돼 큰 아쉬움을 남겼다.
■ 본연의 임무 충실, 화합하는 단체
현 38대 전석호 회장은 케니 박 회장 밑에서 이사장을 역임한 뒤 회장선거에 출마, 지난 5월 단독후보로 무투표 당선됐다. 전 회장은 “선거를 하면 단체가 분열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선거 없이 회장을 선출해야 한다”고 당선 전 수차례 강조했었다. 그만큼 내부화합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전 회장은 취임 후 “한인 상공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차세대 경제리더를 양성하는 상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며 “상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조직으로 재탄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상의는 한국외대와 공동으로 실시하는 글로벌-CEO, 한인상공인의 밤, 퀵북 및 엑셀 온라인 강좌, 오마바케어 세미나, 경제 전문가를 강사로 초빙하는 월례 포럼, 매년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한상대회 참가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구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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