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루스 밀밭
반평생을 미국에 살며 곧잘 머리에 떠올린 글귀가 있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기행문 제목인 ‘기차는 원의 중심을 달린다’이다. 고 장기영 부총리가 젊었을 때 미국 중부 대평원을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몇시간을 가도 그대로인 차창 밖의 가없는 들녘을 바라보며 쓴 수필에 그런 명품제목을 달았다. 그 후 한국일보를 창업한 그는 ‘장 기자’로 불렸다.
명품신문 한국일보의 기자가 된 나도 20년 전 미국대륙을 기차 아닌 자동차로 횡단하며 원의 중심을 달렸다. 대평원이 아니라도 그럴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LA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라스베이거스로, 그랜드캐년으로 갈 때 그랬었다. 지난 독립기념일 연휴에도 I-90 고속도로를 타고 시애틀에서 스포켄 쪽으로 차를 몰며 밀밭으로 이뤄진 원의 중심을 달렸다.
이번 여행의 주제가 바로 밀밭이었다. 밀은 사과에 이은 워싱턴주 제2의 농작물이다. 주로 동부에 펼쳐진 220만 에이커의 밀밭에서 연간 94억달러 상당을 수확한다. 소출이 너무 많아 80~90%를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에 수출한다. 하지만 원의 중심을 달리며 본 고속도로변의 밀밭이 워싱턴주의 밀 집산지는 아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도 아니었다.
시애틀에 이주한 후 10여년간 마음속에 뜸들여온 밀밭 나들이의 행선지는 따로 있었다. 스포켄에서 남쪽으로 60여마일 떨어진 팔루스(Palouse)이다. ‘잔디’를 뜻하는 인디언 원주민 말에서 연유했다는 팔루스는 상주인구가 1,000여명에 불과한 시골동네지만 실제로는 워싱턴-아이다호-오리건 등 서북미 3개주 접경을 아우르는 광활한 곡창지대를 통칭한다.
그 팔루스에 농사꾼 아닌 관광객들의 발길이 연중 이어진다. 물론 밀밭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인데 십중팔구 고급 카메라 장비를 갖췄다. 대부분 아마추어지만 프로 작가들도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사진촬영 워크숍이 열린다. 방문객들을 모아 사진촬영 필수코스로 안내해주는 투어회사도 있다. 현지 작가들이 낡은 헛간을 개조한 화랑에서 작품을 전시한다.
고속도로변의 밀밭을 마다하고 이 시골구석까지 사진을 찍으러 오는 이유는 밀밭의 모습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평야가 아니라 구릉이다. 층층의 밀밭 언덕이 물결을 이룬다. 언덕마다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보리, 알팔파, 카놀라(유채화), 건초 등 다른 농작물 밭이 군데군데 끼어 있다. 초봄엔 연두색, 늦봄엔 진녹색, 한여름엔 황금색으로 전체 색조가 바뀐다.
워싱턴주립대학이 있는 풀만이 유명한 ‘팔루스 풍치 뒤안길(Paloluse Scenic Byway)’의 시종점이다. 첫날엔 북쪽으로, 이튿날엔 남쪽과 서쪽으로 한 바퀴 도는 게 정석이다. 200마일이 넘는 샛길 양옆이 온통 밀밭구릉이다. 거대한 골프장의 비단결 잔디 같다. 나무나 웅덩이 따위의 해저드가 전혀 없다. 골프채를 든 거인이 구릉 뒤에서 금방 올라올 것 같다.
팔루스에서 꼭 볼 곳이 있다. 풀만 북쪽 30마일 지점의 야산 스텝토 뷰트(Steptoe Butte) 주립공원이다. 자동차로 3마일 이상 달려 정상에 오르면 원의 중심에 다시 선다. 발아래 360도가 온통 밀밭이다. 푸른색 계열의 조각 천들을 물결모양으로 누벼놓은 꼴이다. 띄엄띄엄 자리 잡은 농가와 빨간 헛간, 노란색 유채밭과 구름 그림자가 하이라이트를 이룬다.
고려 문인 김황원이 시로 표현 못한 대동강의 아름다움이 이만했을까? 그는 부벽루 벽에 붙은 시들을 다 떼버리고 더 멋진 시를 쓰겠다며 폼을 쟀지만 첫 두 줄만 썼을 뿐 해가 지도록 더 잇지 못하고 울며 내려왔다고 했다. 그가 스텝토 뷰트에 올라왔다면 “넓은 벌 동쪽 머리에 점점 산”이라는 둘째 줄을 “넓은 벌 동서남북에 점점 밀밭”이라고 썼을 것 같다.
팔루스 관광코스는 풀만 서쪽 약 80마일 지점의 팔루스 폭포 주립공원까지 이어진다. 밀밭 한 가운데 화산용암층 구멍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비경이다. 팔루스 폭포와 스텝토 뷰트만 보려고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많다. 자연경관 못지않게 인조경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이번 밀밭여행을 통해 터득했다. 미국은 역시 넓고 크다는 사실도 재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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