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고 아삭한 배춧잎이 빛 곱고 차진 양념에 잘 버무려져 하얀 접시에 정갈하게 놓인 김치, 그 위에 뿌려진 통깨의 매력까지 삼삼하게 떠오르며 김치 생각이 간절했다. 유혹처럼 핼끔대는 김치 코너로 가서 김치 병을 들여다보면서 뚜껑을 살짝 틀었더니 돌파구를 찾으며 부글거리던 김칫국물이 총알처럼 솟구치며 내 옷과 카트 속에 담아놓은 식품들을 샤워시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향 또한 얼마나 대단하던지.
계산대로 가서 내 몰골을 보이면서 종이타월을 청했다. 유난히 빨갛게 입술을 고쳐 바른 여자 점원이 입을 반만 벌리고 뭐라고 대답한다. 종이가 없다는 것 같았다. 다시 물었다. 또 뭐라고 웅얼거리며 내 등 뒤 쪽을 손가락질 한다. 순간 팔짝 뛸 정도로 화가 났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뭐라구요?”라고 투정을 부렸다. 그녀가 가리키는 내 등 쪽에만 페이퍼 타월이 비치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서서 종이 한 장을 얻어가지고 대충 닦고 보니 계산대의 점원은 물건들을 플라스틱 백에 담아 놓았을 뿐 카트에 넣어주지도 않고 멀거니 서있다.
불난 데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격이었다. 물건들을 카트에 팍팍 던져 넣고 “무슨 서비스가 이 모양이야”라고 퍼붓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식품점을 나왔다.
씩씩거리며 운전대를 잡고 한참을 달리는데 ‘어, 그 얼굴!’ 어디서 본 것 같았다. 누구일까? 맞아 맞아, 2년 반쯤 전에 연락이 닿아 만난 제자, 내가 점심을 샀었지. 그 제자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생각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내가 치매라도 앓고 있는 것인가.
마침내 차근차근 상황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김칫국물을 뒤집어 쓴 건 내 실수인데 그렇게 짜증을 낼 게 뭔가. 그녀가 립스틱을 고쳐 발랐다는 것은 나를 알아본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옛 스승에게 단정하게 보이고자 한 심리적 작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너무 막무가내여서 말을 붙이지 못한 것이었을까?
상대가 아는 체 할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던 내 꼴은 얼마나 추했을까? 입을 반만 벌리고 중얼거린 상대가 야속했고 치매환자처럼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입은 소태처럼 쓰고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가 나를 칭칭 동여맸다. 만일 그녀가 “선생님, 나오셨어요?” 라고 아는 체라도 해 주었더라면 아마 반가워서 김칫국물 샤워로 상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을 것이었다. 사람을 못 알아본 대가가 이렇게 클 줄이야.
사람이 화가 날 때는 인간이 가진 어떤 차원의 지성들은 사살되어버리든지 어디로 망명을 가버리는 것일까. 부당함도 정당함도 가릴 수 없는 사건을 지워버리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무시해버리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그 사건을 나열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요한 것은 ‘태도’ 라는 말이 있다. 사람 상호간에 대하는 태도가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싹튼 친밀감이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태도’가 신뢰와 존경의 요건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얼마를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 할 것인가? 나는 자신이 미워질 때 가장 고독하다. 인간의 모자람만이, 실수만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면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이 더 인간적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을 질타하고 비웃는 계기가 있음으로써 보다 나은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김치코너에서 생긴 일이 결코 잃은 것뿐인 사건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정직한 것 같다. 마음은 늘 진액을 낭비해가면서 나를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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