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모에 반항하며 가출한 여고생이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학비와 생활비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는 기사를 읽었다. 뉴저지 주에 사는 레이첼이라는 이 당돌한 여고생은 법정에서 자신이 학대를 받아 가출한 만큼 부모는 자신의 사립고 수업료와 앞으로의 대학 등록금, 생활비를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으로 보이는 그녀의 부모는 “엇나가는 딸에게 부모로서 타이른 것이 학대가 될 수 있느냐”면서 “학비는 자녀로서 부모가 정한 규율을 지킬 때 지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세대 간의 여론대결로 번질 것 같았던 이 재판은 판사가 “말 안 듣는 딸에게 학비를 대줄 의무는 없다”고 부모의 손을 들어주면서 예상보다 싱겁게(?)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엄마인 나는 이 기사를 보고 “그것 참 고소하다”며 웃고 넘길 수만은 없었다. 그 부모와 딸은 어쩌다가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로 만나게 되었으며, 재판은 일단락되었지만 이들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이런저런 상념들이 잇따라 떠올랐다.
당시 가장 견디기 힘들었을 사람은 아마도 “고통스러워 할 딸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워 할” 그녀의 엄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지나 간 이야기가 되었지만, 나 역시 딸아이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을 때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다. 도대체 딸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라던 시절의 환경과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아이들의 환경과 비교해 보아도 별로 부족할 게 없어 보였는데, “도대체 무엇이 못마땅해서 이런 복에 겨운 투정을 부리는가?”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저보다 훨씬 못한 환경 속에서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란 생각은 아이에 대한 분노의 감정마저 일으켰다.
그 무렵, 어떤 글에서 읽었던 한 마디가 가슴에 들어 왔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요지는 “자녀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고 그 아이가 출발선상에서부터 성취한 것을 보아주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지만 순간적으로 뜨끔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는 딸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대놓고 비교하며 다그치는 일 정도는 삼갈 줄 아는, 스스로 교양 있는 엄마임을 자부하고 있었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내 경우는 오히려 그 보다 더 나쁜 케이스였다. 머릿속에 이미 만들어 두었던 “내 딸의 모습”과 끊임없이 대조하며 “부족하다”는 생각을 늘 안에 품고 있었으니까.
그 후부터 전에는 안보이던 것들이 많이 눈에 들어 왔다. “엄마는 결코 내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는 딸아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도 이해가 되었다.
세상에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있으며, 딸아이는 내가 아니라는 진정한 자각(머리로 하는 이해가 아니라)이 들면서 내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 발 비켜나서 하는 응원”뿐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막막함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레이첼의 부모, 아니 반항하는 자녀를 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지혜와 성찰로 위기를 극복해 가기를 빌어본다. 아이를 바꾸기 보다는 부모가 먼저 내려놓는 것이 엉킨 실타래를 푸는 첫 걸음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