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산에 올라라’
등산길에 생뚱맞게 영화장면을 떠올릴 때가 종종 있다. ‘노스 페이스’나 ‘K-2’처럼 주인공이 까마득한 빙벽을 기어오르는 아슬아슬한 산악영화가 아니다. 느긋하고 흐뭇하고 아름다운 노래들이 깔린 뮤지컬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첫 장면이다. Mt. 베이커와 허리케인 리지가 특히 그 장면의 분위기를 닮았다. 줄리 앤드류스의 노래 소리가 들릴 것 같다.
“그 산은 노래소리와 함께 살아있어요. 천년 동안 불려온 그 노래소리를 내 마음에 채워주지요. 내 마음은 듣는 노래마다 따라 부르며 새들처럼 날개 짓하고 싶어 한다오…나는 마음이 외로울 때 그 산에 가지요. 거기선 예전에 들었던 노래들을 다시 들을 수 있어요. 내 마음은 그 노래소리로 축복받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노래 부를 거예요”
이 영화엔 명곡이 수두룩하다. 수녀원장이 천방지축의 견습수녀 마리아(줄리 앤드류스)에게 조지 폰 트랩(크리스토퍼 플러머) 예비역 해군대령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인생살이 역경에 도전하라며 부른 ‘모든 산에 올라라’를 비롯해 ‘도-레-미 송,’ ‘내가 좋아하는 것들,’ ‘외로운 염소목동,’ 특히 오스트리아의 국가나 민요로 오인 받는 ‘에델바이스’ 등이다.
엊그제 그 영화장면들을 산이 아닌 책상머리에 앉아 떠올렸다. 영화에 나온 트랩자녀 일곱명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둘째딸 마리아 폰 트랩이 지난주 백수(白壽, 99세)를 향수하고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됐다. 그녀는 마리아가 본명이지만 영화에서는 주인공인 계모 마리아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루이자’로 개명됐다. 영화 속에선 13세였다.
그녀는 수녀 마리아의 오리지널 제자다. 원래 마리아는 전체 일곱 어린이의 가정교사가 아니라 둘째 딸만을 위한 가정교사였다. 그녀는 당시 성홍열 환자로 학교에 갈 수 없어 입주개인교사가 필요했다. 트랩 대령의 첫 부인도 성홍열로 죽었다. 마리아가 일곱 아이들을 모두 가르친 건 극적효과를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 음악은 모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영화 내용은 허구 투성이다. 트랩 가족이 알프스 산을 걸어서 넘어 스위스로 망명하는 마지막 장면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들은 당당하게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간 뒤 거기서 미국이민을 추진했다. 아이들의 나이도 터무니없이 줄였고, 순서도 뒤바뀌었다. 루이자는 당시 13세가 아니라 21세였고, 둘째 아이로 나온 아들이 사실은 첫째 아이였다.
마리아 수녀 자신도 너무 미화됐다. 그녀는 영화에서처럼 다소곳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왈가닥이었고 혈기가 불같았다. 화를 내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녀는 트랩 대령과 쉽게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녀가 진정 사랑한 것은 트랩이 아닌 아이들이었다. 트랩도 유머감각이 없는 엄격한 군인 아빠가 아니라 사실은 자상한 보통 아빠였다.
한국에선 트랩가족을 다룬 독일영화 ‘보리수’가 먼저 상영됐다. 원제가 ‘미국의 트랩 음악가족’인 이 영화는 앞서 크게 히트했던 ‘트랩 음악가족’의 속편이다. 뉴욕 빈민가에 이민 보따리를 푼 트랩가족은 순회공연을 갖지만 객석은 매번 텅텅 비었다. 마리아가 대가족을 이끌고 싸구려 식당을 찾아가며 아이들의 머리수를 세는 노상 인원점검 장면이 웃겼다.
하지만 마리아는 수녀원장의 격려처럼 ‘모든 산’을 극복했다. 비자가 만료돼 추방됐지만 다시 들어왔다. 신문에 홍보기사를 내보내고, 미국인들의 ‘섹스어필’ 취향대로 무대의상도 바꿨다. 청중이 모여들어 돈을 벌었다. 트랩 가족은 40년대초 버몬트주 스토위에 스키 산장을 개업해 생활근거지로 삼았다. 평생 독신으로 산 둘째 딸이 숨진 곳도 그 산장이다.
리처드 로저스(작곡)와 오스카 해머스타인(작사) 콤비의 최고걸작인 이 뮤지컬은 반세기가 지난 요즘도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달까지 3개월간 공연됐다. ‘사운드 오브 뮤직’과 ‘보리수’는 아름다운 노래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트랩가족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기 위해 오늘도 ‘모든 산에 오르고 있는’ 한인들에게 위안과 격려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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