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전쟁’
여섯 살 손녀가 어줍게 그려서 보내온 크리스마스카드에 답장을 하려고 상점에 가서 카드를 사려다 낙담했다. 진열된 카드가 너무 빈약해 ‘초이스’가 없었다. ‘Merry Christmas’보다 ‘Happy Holidays’나 ‘Season’s Greeting’으로 된 카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올해 내가 받은 크리스마스카드들을 다시 펼쳐보니 역시 거의 모두 ‘Happy Holidays’ 카드이다.
엊그제 애리조나 피닉스의 월마트 앞에서 구세군 자선냄비 종을 흔들던 자원봉사 여학생이 행인에게 주먹질을 당했다.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해피 홀리데이’라고 인사하자 그녀가 다가와 냄비에 돈은 넣지 않고 “해피 홀리데이가 아니라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해!”라며 여학생의 팔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경찰은 폭행증거가 없다며 아줌마를 체포하지 않았다.
기쁨과 평화의 만국절기인 크리스마스에 미국인들은 전쟁을 치른다. ‘크리스마스 전쟁(War on Christmas)’이다. 이미 고유명사가 됐다.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는 교회측과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는 무신론자 및 불가가지론자 간의 전쟁이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북한문제로 확연히 구분되듯 미국에선 보수와 진보가 크리스마스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가장 원천적인 논쟁이 바로 인사말이다.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홀리데이’의 대결인데, 전자가 점점 밀리는 판세다. 크리스마스카드에서만 ‘메리 크리스마스’가 빠진 게 아니다. 메이시, 시어스, 타킷 등 주요 백화점 점원들은 손님들에게 ‘해피 홀리데이’라고만 인사하도록 교육받는다. 정부기관의 공문서에서 ‘메리 크리스마스’가 빠진 건 이미 오래 전이다.
크리스마스 전쟁을 본격적으로 불붙인 사람은 폭스-TV 앵커인 빌 오레일리다. 그는 9년 전 처음 ‘크리스마스 수호’ 캠페인을 시작한 뒤 매년 연말 이를 재탕하며 백인, 노인, 기독교신자들이 대다수인 보수진영의 선봉장을 자임한다. 그는 ‘해피 홀리데이’라는 인사말에는 ‘그리스도의 탄신일’을 경축한다는 크리스마스 본래의 뜻이 완전히 배제됐다고 지적한다.
사흘 전 오레일리는 크리스마스 전쟁이 가상이 아닌 실제 전쟁이며 “우리(보수)가 결국 이겼다”고 선언했다. 공화당 부통령후보(2008년)였던 새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도 저서 ‘크리스마스 마음 지키기’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회복을 주창했다. 텍사스주 의회는 학생들이 마음 놓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라며 올해 ‘메리 크리스마스 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오레일리의 승리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최근 대중종교 조사연구소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49%가 ‘해피 홀리데이’를, 43%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선호한다. 해피 홀리데이는 18~29세 젊은층의 3분의2, 민주당원의 58%, 소수계 개신교도의 55%, 천주교신자의 50%가 선호하고, ‘메리 크리스마스’는 노인층 39%와 공화당원 61%가 선호한다.
이달 초 퓨 연구소 여론조사에서도 크리스마스가 기독교 축일이라는 응답자는 전체의 절반이었고 대중문화행사라는 사람이 3분의 1(비신자는 10명중 8명꼴)이었다. 전문가들은 동성결혼, 존엄사, 마리화나끽연 등 예전엔 꿈도 못 꿨던 금기사항들이 합법화되는 세태에 따라, 특히 보수기반인 노인층이 소멸해가면서, 크리스마스 세속화도 가속될 것으로 점친다.
그러나 인사말 시비 따위가 크리스마스 전쟁의 본령은 아니다. “주린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벗은 자를 입혀주고, 병든 자를 돌보며, 옥에 갇힌 자를 위문하라”는 예수의 불우이웃 돕기 가르침을 전쟁 치르듯 실천하는 것이 먹고 마시고 선물 나누기에나 몰두하는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에게 보여줄 보수의 진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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