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게 8월15일은 광복절이지만 일본에게는 이 날이 국치일이며 미국에게는 승전일이다.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 일본왕의 항복 선언을 방송으로 듣는 일본국민들의 사진을 보면 비참하기 짝이 없다. 전 국민이 침통한 표정으로 마치 벌서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여 방송을 듣고 있다. 당시 일본왕은 살아있는 신으로 받들어 졌기 때문에 얼굴을 들고 왕의 방송을 들으면 불경죄에 해당 되었다. 일본 국민들은 이날 처음으로 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본의 항복은 8월14일 열린 어전회의에서 결정 되었다.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는 아나미 육군상 등이고 무조건 항복하는 길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주장한 각료는 도오고 외상 등이다. 이들의 열띤 주장을 다 들은 후 히로히토왕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후일 일본언론들에 보도된 어전회의에서의 히로히토 발언내용은 다음과 같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어떻게 하든 국민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은 완전히 초토화 된다. 국민을 더 이상 고통 받게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참기 힘들며 선조에게도 대할 면목이 없다. 일본이 완전히 멸망하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종자가 남아 있으면 다시 부흥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부디 육군과 해군대신이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오늘날 일본의 정치인이나 학자들은 8.15를 전후한 히로히토왕의 결단을 두고 “천황은 평화주의자였으며 군부의 강경론자들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히로히토의 승낙 없이는 군부가 절대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오히려 전쟁을 고무했다. 그러다가 소련의 참전을 보고서야 항복을 결심한 것이다. 소련 참전 이전에 빨리 결심 했더라면 수십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며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공산주의자가 일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천황제도의 폐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황제도를 부인하지 않는 미국에 빨리 항복하면 왕실존속은 유지하지 않을까하는 희망에서였다고 본다. 이는 맥아더의 회고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히 소련은 이번 기회에 일본의 천황제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 했으며 영국, 오스트랄리아와 더불어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법정에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일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이를 결사 반대했다. 맥아더는 트루먼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히로히토왕을 법정에 세우면 자존심을 생명으로 아는 일본인들이 전국에서 게릴라전을 펼칠 것이며 히로히토왕을 순교자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을 통치하려면 미군 100만 명을 증파해야 한다”고 우겨 트루먼도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는데 동의한 것이다. 히로히토왕이 제 발로 걸어가 맥아더와 기념촬영을 한 것은 미국에 대한 감사표시였다고 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는 달리 히로히토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맥아더 덕분이며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도 독일을 소련과 분할해서 점령한 것과 같은 실수를 일본에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히로히토왕을 법정에 세웠더라면 일본의 이웃 침략을 천황이 인정하게 되어 오늘과 같은 일본인들의 역사왜곡 망언은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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