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LA의 겨울은 아름답다. 나무들은 물기를 머금어 생기에 빛나고 붉고 노란 낙엽이 떨어진 갈색과 잿빛의 거리는 색감이 깊은 그림처럼 시선에 풍요롭다. 간혹 물이 고인 웅덩이에 비치는 하늘과 구름, 청명하고 밝은 도시에 그토록 오래 기다린 습기 가득한 깨끗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 때에, 정말 멋진 도시에 살고 있다는 기쁨이 솟는다.
마치 이 도시의 마지막 며칠을 사는 사람처럼 나무들이 아름다운 거리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건물을 바라보는 적이 거의 없고 오직 나무, 나무들만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어, 특히 눈여겨 바라보며 비 내리는 겨울거리를 걷는다. 잎들이 반쯤 떨어진 커다란 붉은 단풍나무는 마치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듯 마지막 잎새들이 빗속에 흔들린다.
폴 게티 뮤지엄에서 플로렌스의 성화전을 보았다. “플로렌스는 가장 위대하고 행복한 시대에 있었고 가장 고결한 귀족정신과 선량한 기사들이 최상의 문화와 부를 향유했다”라는 소개의 글이 전시장 입구에 쓰여 있었는데 나에겐 현재의 LA가 그러한 문화와 경제를 품고 있는 듯 느껴진다. 이 불경기에 무슨 소리냐고 누군가 묻기도 하겠지만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조금씩 회복과 희망의 활기를 느낀다.
사실 살아있는 매 순간이 최선의 시간이다. 불경기, 호경기의 경제지표만이 삶의 전부가 아님이 자명하고 이 시대는 너무 많이 가진 게 문제인 자본주의 시대이다.
플로렌스 성화전을 보면서 한인사회가 그렇게 멋진 정신적 문화 도시로 태동하는 미래의 꿈을 꾸어 보기도 하였다. 누군가 그 꿈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11월엔 파크뷰 화랑에서 제7회 스튜디오아트 어린이 미술전을 보았고 리앤리 화랑에선 미술가 협회와 문화원이 주관한 한인 대학생 미술 공모전을 보았다. 자유롭고 천진하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미술세계가 무척 좋아 두번이나 찾아가 한참 화랑에 머물렀다. 아이들은 미래의 문명을 이미 다 아는 듯하다.
어린이들의 작품이 걸린 화랑이 부드럽고 열린 행복의 에너지로 가득 찼음에 비해 대학생 공모전은 구태의연하고 빈곤한 느낌을 준다. 20대의 미래의 한인예술가들은 진지하고 성실하지만 꿈과 신화를 상실한 듯 소극적이다. 애써 작업했으나 오직 젊은 청춘만이 누릴 수 있는 무모한 열정이 결여된, 이미 지친 듯한 그들의 창백한 정신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예술에 일생을 바쳐야 하는 젊은 예술학도들을 눈여겨보며 귀히 여기고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너는 이 낡은 세계에 싫증이 나 버렸다. / 목녀여 오 에펠탑이여 / 오늘 아침 저 다리들의 양떼가 우짖는다./ 너는 이 그리스 로마의 고대 속에서 / 사는 것에 신물이 나 버렸다./ 너는 드높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 광고와 카탈로그와 포스터를 읽는다. / 그것이 바로 오늘 아침에는 시다. / 그리고 산문이 필요하면 여기 신문이 있다. / 단돈 25상팀으로 탐정물들을 가득 담고 배달되어 왔다.”(아폴리네르, ‘지대(zone)’)
인간과 기계가 대학생 공모전 전시작품들의 주된 주제였는데 전시장을 나오며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작품을 기억했다. 기괴한 매력이 있어 젊은 시절부터 나의 화실 벽에 붙여져 있는 낡은 흑백사진이다. 기계 속에 살아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유령이 생명의 상징인지 죽음의 상징인지 일본인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계의 선들을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겨울비는 다정히 대지를 적시고 내가 좋아하는 키 큰 단풍나무의 붉은 잎사귀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선하다. 오늘도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붉은 단풍나무가 줄을 서 있는 그 거리에 다시 가 보아야겠다.
<박혜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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