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타고 이틀 동안 산 속을 헤매고 다닌다면 억새풀이 바람에 부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리라 싶었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산으로 여행지를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보고 싶은 억새풀은 나타나지 않았다. 딱 한 번 마주친 어른 팔뚝보다 크고 풍성한 억새풀 무더기도 40여년 전에 본 그 억새풀은 아니었다.
바람이 불며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가을날이었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교복을 입은 채로 소주 한 병과 애기 주먹만 한 땅콩 한봉지를 사서 책가방 속에 넣었다. 그 전해 겨울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아버지는 종종 소주나 정종으로 반주를 드셨다.
혼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갔다. 버스 속에서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버스에서 내려 꼬불꼬불 산을 올라 산소를 찾아갔다. 묘소를 제대로 찾아내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봉분 앞에 소주를 붓고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인적이 드문 산 속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했다. 내려올 때 보니 지리산에는 억새풀이 지천으로 널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억새풀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산길을 내려왔다.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해질녘 이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란 예감이었다. 이제 아득한 기억 속으로 가라앉은 아버지를 떠올리려니 석양 어스름에 흔들리던 억새풀이 먼저 떠오른다. 지리산 자락을 혼자서 타박타박 걸으며 억새풀을 쓰다듬거나 바라보며 산길을 내려오던 기억이 뒤를 잇는다.
딸의 결혼식을 시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치렀다. 순조롭게 잘 치른 것 같아 만족스럽지만 무엇보다 딸아이가 제 아버지와 함께 팔짱을 끼고 웨딩마치에 맞춰 입장할 수 있었던 것이 제일 좋았다. 딸의 결혼식을 마친 후 갑자기 친정아버지가 몹시 그리웠다. 논리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것이다. 속으로 울기도 하고 때로는 숨어서 혼자서 훌쩍거리기도 했다.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되새김질 해 본들 아무 소용 없는 것은 지우개로 지우듯 잊어버리려 했고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말이다.
결혼식을 마친 후 한국에서 온 친척들과 라스베가스를 거쳐 브라이스캐년, 자이언트캐년을 3박4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억새풀은 없었지만 대신 자이언트캐년의 시닉 드라이브웨이 양쪽 옆에 노란색의 스펙트럼으로 멋있게 물든 느릅나무가 빽빽히 서 있었다. 어떤 예쁜 노란 손수건을 매단들 저렇게 아름다울까 싶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개울가 노란 느릅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빨갛거나 오렌지색으로 물든 단풍나무가 섞인 모습은 참으로 예뻤다. 천국처럼, 어느 사진작가의 멋진 작품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나의 그리움을 다독였다.
이제 나이가 드니 내 마음의 의지가 내 삶의 틀림없는 주체인 것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식별해서 보는 내 마음, 때로 슬픔이 몰려와도 슬픔 속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의지, 주변인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에 노여워하지 않고 여유롭게 넘기는 마음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푸른 하늘, 낙엽들, 나무들, 구름들,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들 … 이 대지의 모든 아름다움이 나에게 한없는 위안과 용기를 준다.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답게 나만의 개성으로 사는 거다 다짐한다. 씩씩하게, 건강하게, 강인하게, 점점 점잖아지면서, 점점 인생을 배워가면서, 무엇보다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워가며 사는 거다 다짐한다. 세찬 바람이 불어도, 억새풀처럼 흔들리되 절대로 꺾이지 않고, 주저앉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독특한 인생길이 있음을 다시한번 확인한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아침 안개처럼 잠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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