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에 무더위가 계속되던 얼마 전, 나는 공기 시원하고 하늘 청명하고 푸르른 필라델피아를 딸아이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딸이 올 봄부터 다니고 있는, 고색창연한 건물에 숲이 우거진 대학교정을 함께 거니는 것은 기쁨이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던 딸은 캄보디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낙후된 지역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는 의과대학 진학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 아이의 가는 길이 멀고 의과대학 과정이 쉽지 않겠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이 뜻을 세우고 도전하겠다는 것이 대견해서, “시작이 반”이니 조급해 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곳에 간 김에 워싱턴 D.C.에 들러 그동안 꼭 가보고 싶었던 세계은행을 방문하였다. 마침 세계은행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는 사촌동생이 그곳을 안내해주었다. 백악관 바로 옆에 있는 세계은행은 유엔국제통화기금(IMF)과 더불어 3대 세계기구에 속한다.
1946년 발족한 이 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피해 국가들의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지원을 목적으로 유엔 산하에 주요 선진국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지금은 낙후된 지역의 경제부흥을 위한 금융지원도 하고 세계의 빈곤퇴치에도 앞장서고 있다. 도로 개발, 의료센터 건설, 경제활동 도와주기, 농부를 위한 기구와 종자 개량 공급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세계은행의 로비에는 어린 아들이 앞장서서 막대기를 잡고 따라오는 장님 아버지를 안내하며 함께 걷는 동상이 서 있다. 이것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아버지는 흑파리에 의해 전염되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장님이 되는 River blindness라는 병에 걸린 사람을 상징한다. 아프리카에서 많이 발병하는 이 질환에 1,800 만명 정도가 감염되었고 그 중 약 30만명이 장님이 된 것으로 추산된다.
치료와 예방은 환자가 질병 초기에 기생충 약을 먹고, 주위에 있는 흑파리를 없애는 것이다. 세계은행이 주도한 River blindness 퇴치 활동은 매우 성공적인 일로 알려져 있다. 돈을 빌려주고 장사하는 은행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세계은행의 폭넓은 활동에 감명을 받았다.
이런 세계적 기구에 한인이 총재로 부임했다는 사실은 같은 민족으로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사촌 동생은 덧붙였다. 김용 총재의 활동에 대해서는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의사이면서도 인류학을 공부한 김용 총재는 일찍부터 중남미 빈민지역에서 결핵 퇴치, 또 세계 여러 곳에서 말라리아, 에이즈 퇴치에 앞장 선 훌륭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 총재는 어릴 적부터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평생 스승으로 생각하며 살아 왔다고 어느 글에서 썼다. “가난하고 불쌍한 국가들을 위해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라고 외친 킹 목사의 말과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는 그의 어머니의 말을 늘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고 하였다.
다트머스 대학 총장 시절 그는 학생들에게 “꿈은 높고 야무지게, 그러나 두 다리는 땅에..” 라는 말로 꿈은 원대하게, 그러나 오늘은 성실하게 살 것을 격려했다고 한다.
세계은행 건물에서 멀지 않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연설한 링컨 대통령 기념관 앞으로 자연히 나의 발걸음이 옮겨졌다. 링컨 대통령 대리석 조각을 뒤로 하고 킹 목사가 연설을 했다는 계단에 서보았다. 1963년 8월에 2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역설한 킹 목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였다.
링컨 대통령, 킹 목사, 그리고 김용 총재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며 멀리 바라보니 미국의 자유와 평등의 상징인 국회 의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딸아이와 우리 후손들이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고, 조물주의 걸작품인 모든 인간을 사랑하며, 꿈에 도전하며 현실을 성실하게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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