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그들이 당한 일을 비밀에 부치려 든다. 성폭행은 피해자가 이를 밝힐 경우 더 큰 피해가 따라오는 범죄다.
털어놓는 순간 심판대 서는 건
가해자가 아닌 억울한 피해자
내밀한 사생활 파헤쳐지고
권력자 상대 땐 거짓말쟁이로 역풍 맞기도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여성은 성폭행이나 성추행의 참담한 기억을 갖고 있다.” 건강 칼럼니스트인 제인 브로디가 성폭력과 관련해 최근 뉴욕타임스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브로디에 따르면“이들은 최소한 한 번 이상 성적인 희롱이나 부적절한 접촉, 강간 등 성폭력에 노출됐다. 그러나 한평생 상처로 남을 봉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직후 피해 사실을 털어놓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거나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브로디는 그녀 역시 어린 시절 세 차례나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히고 열 한 살 되던 해 겪었던 악몽 같은 경험을 공개했다.
당시 동네 잡화점을 운영하던 중년 남성은 캔디를 사러온 브로디에게 강제로 그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 그날부터 브로디는 임신 공포에 사로잡힌 채 한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성에 관해 무지하기 그지없었던 그녀는 ‘남성’에 손을 대기만 해도 임신이 되는 줄만 알았다.
브로디가 특별히 유난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사건’이 터졌던 해인 1952년까지만 해도 임신한 여교사는 티가 나기 전에 병가를 내고 교단을 떠나야 했다.
이처럼 경직된 분위기 속에 미성년자들의 머릿속에 제대로 된 성지식이 축적되어 있었을 리 만무다. 물론 미성년자들을 위한 체계적인 성교육도 없었다.
브로디는 부모님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못했다. 아무래도 스스로 자초한 일인 것만 같아 입조차 뻥끗 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반세기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성폭력 피해자들은 대부분 침묵한다.
전문가들은 반세기 전과 달리 성교육이 일반화되고 성폭력에 관한 경각심 역시 크게 고취됐지만 성범죄 피해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그들이 당한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려 든다고 말했다.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경찰에 신고를 한 성범죄 피해자는 또 한 차례의 견딜 수 없는 시련을 당하게 된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법적제도가 상처를 키우는 굴레로 둔갑을 하기 일쑤다. 게다가 세간의 관심을 끄는 ‘대형사건’일 경우 언론조차 사실관계가 완전히 입증되기 전까지 피해자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가해자가 유명인일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20여년간 강간 피해 후유증을 조사한 미시간 주립대 심리학 교수 레베카 캠벨은 “피해 사실을 신고할 경우 더 큰 피해를 당해야 하는 범죄는 이 세상에 성범죄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성범죄의 경우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피해자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을 몇 번씩 되풀이해 진술해야 한다. 때로는 피고인 측 변호인단에 의해 내밀한 사생활이 속속들이 파헤쳐지기도 한다.
중범죄인 성폭행과 달리 경범에 속하는 성추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피해 사실을 알렸다가 공연스레 엄청난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그 대표적 예가 1991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애니타 힐 사건이다.
변호사이자 법학자였던 애니타 힐은 연방 대법관 인준을 위한 상원 청문회에서 대법관 지명자인 클레어런스 토머스의 부하 직원으로 일하던 당시 그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힐은 “낙태권 옹호론자들의 사주로 토머스 지명자를 중상모략하고 있다”는 보수진영의 집중공세에 시달렸다. 결국 토머스 지명자는 인준을 통과했고, 힐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성범죄가 터질 때마다 피해자의 신뢰성이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은 기본이다.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에게 오럴섹스를 강요받았다고 밝힌 맨해턴 호텔 청소부 나피사토 디알로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까지 제시했지만 과거 이민서류에 허위사실을 기재했고 본 사건과는 무관한 다른 일과 관련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구정물만 잔뜩 뒤집어썼다.
반면 스트라우스-칸은 DNA라는 확실한 증거를 남겼음에도 “상호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주장을 앞세워 최악의 상항을 피해갔다.
캠벨 박사는 DNA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성범죄 피해자를 다루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스트라우스-칸의 예에서 보듯 성공적인 형사소추가 가능한 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기소유지가 힘들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내처지곤 한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캠벨 박사는 성범죄는 공공안전에 관한 이슈라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성범죄자들이 연쇄범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에 이들의 죄상을 철저히 밝혀 응징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범행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1987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126명의 성폭행범들은 882명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907건의 강간을 저지른 것으로 집계됐다.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명을 상대로 반복해서 발생하는 성범죄의 대표적인 예가 아동성추행, 혹은 미성년자 성폭행이다. 이 유형의 범죄는 누군가 권위를 지닌 위치에 있는 사람의 묵인 아래 자행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미식축구부 부코치가 선수 열 명을 성추행한 사건이 꼽힌다.
이 사건으로 존경받던 펜스테이트 주립대 축구부 감독 조 패터노가 해고됐고 대학 총장이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출당했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피해자는 남녀비율이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피해자의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늘어난다. 성인 피해자들의 90%는 여성이다.
지난해 ‘강간, 추행 및 근친상간 전국 네트웍’이 집계한 미국인 성폭력 피해자는 27만2350명으로 이들의 80%가 30세 이하였다.
또한 연방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여성 피해자의 4분의 3이 친구나 지인, 가까운 동거인 등 안면이 있는 남성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하지만 경찰에 보고된 케이스는 실제 발생건수의 40%에도 미치지 못한다.
특히 남성 피해자와 지인이나 동거인에 의해 강간당한 여성은 신고를 꺼리는 경향을 보인다. 마약을 했거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아는 사람에게 일을 당한 여대생은 “내 탓”이라는 생각에 대체로 신고를 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성폭력에는 치부노출, 원치 않는 신체접촉, 음란행위, 구강섹스와 항문섹스, 신체부위나 기구를 이용한 강간 등이 포함한다.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성행위에 합의할 수 없다.
나이에 상관없이 협박이나 강요에 의한 관계, 정신적 장애자와 만성 정신질환자, 약물이나 알콜에 의해 무기력해진 상태의 남녀, 의식을 잃은 상대, 수술을 앞둔 마취상태의 환자 등과의 관계는 무조건 성폭행에 해당한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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