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버릇은 어른 하기 나름이라는 명제에 금이 가고 있다. 신경구조의 차이 등 선천적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아이들이 원하는‘물건’을 사주는 것으로 부모의‘관심’을 대신하려 드는 것은 버릇을 망치는 첩경이라는 점이다.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뒤집어 말하면 부모가 잘못 키웠다는 얘기다. 자녀 훈육의 1차 책임이 부모에게 있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사랑스런 딸이 원한다면 달이라도 따다 줄 듯‘오버’하는 너무도 자상한 아빠, 아들의 말이라면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각 실시간 실행모드로 들어가는 엄마 탓에 아이들이 죄다 응석받이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잉보호·묻지마식 베풀기는‘사랑 아닌 독’
한계·좌절도 느껴봐야 진정한 생존기술 터득
“버릇 없는 정도 과거-현재 세대 비교는 무의미”
언론인이자 작가인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최근 뉴요커지에 실린 서평에서 미국의 어린이들을 자립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페루비아 아마존 부족의 아이들과 비교하며 “우리는 자신의 신발 끈조차 매지 못하거나, 아예 혼자 힘으로 매려고 들지 않는 신세대 어린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뉴욕타임스는 육아칼럼을 통해 “콜버트의 비판이 이 시대의 많은 부모들 사이에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역시 뉴욕타임스의 오피니언 지면에는 자녀들에게 “실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논지의 글이 올라왔다. 행여 아이의 마음이 상할까 이중삼중으로 설치한 보호막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부모의 지나친 과보호가 미래를 책임치고, 헤쳐 나가야 할 어린이들을 무능하고, 이기적이고, 의존적이며 버릇장머리 없는 ‘갈지자 세대’로 편입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뉴욕 메디칼 칼리지의 소아발달행동학 전문의인 마크 버틴 박사는 이 같은 비판에 즉각 동조하고 나섰다.
그는 어린이들의 행동장애는 선천적 신경구조, 기질과 각 가정의 양육방식 등이 원인으로 작용한다며 “이제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자기 통제와 감정 복원력을 키워주는 양육방식이 자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버틴 박사는 “우리가 지금 말하려는 바는 한계를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상에 자녀의 행복을 원치 않는 부모는 없다. 자식들이 매 순간을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게 세상 모든 부모 마음이다. 가능만하다면 내 ‘새끼’들만은 한계를 느끼지 않고 살도록 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버틴 박사는 “어떤 생존기술들은 한계와 좌절을 느끼며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그들에게 실망할 기회를 허용해 주어야 한다는 지적을 가슴 깊숙이 새겨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한계를 정하고 함께 참여해야 할 가정일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기대역할을 결정하기가 점차 복잡해진다.
한계 설정은 아이들에게 “No”라고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 자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하고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브라운 유니버시티의 소아학 교수이자 퍼시 베이비 클리닉의 의료과장인 파멜라 하이 박사에 따르면 한계 설정을 둘러싼 부모 자식 간의 기 싸움은 주로 먹거리와 취침, 그리고 TV나 컴퓨터 등 전자매체 등을 중심으로 발생한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허용되는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등을 구분하는 한계 설정은 아이들이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고, 부모가 생각하는 행복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아이들의 머리가 커지면 한계의 중심축은 ‘물건과 관련한 이슈로 이동한다.
하이 박사는 “아이의 버릇을 잘못 들이는 것과 관련된 이슈는 크게 관심(attention)과 물건(things)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지적한다.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지에 대한 부모의 깊은 관심은 절대 자녀를 버릇없게 만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런 관심은 많이 기울일수록 좋다.
하이 박사는 그러나 물건에 관해서는 다소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건’으로 부모의 ‘관심’을 대신하려 드는 것은 금물이라는 뜻이다.
하이 박사는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죄책감을 물질로 보상하려는 심리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자기 위안에 초점을 맞춘 ‘묻지마’식 베풀기는 자녀에게 독이 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어린 아들이나 딸의 방에 대형 TV를 들여놓고 어떤 채널이건 마음대로 돌려보도록 하는 것은 자녀를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말만 하면 원하는 것을 척척 쥐어주는 아빠와 엄마가 아이들에게는 ‘나이스 대디, 원더풀 마미’로 비쳐질 수 있지만, 가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한계를 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모가 정말 좋은 아빠, 엄마다.
하이 박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행동문제가 100% 가정교육 실패의 결과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한때 무능하거나 파괴적인 가정교육 탓으로 여겨졌던 많은 행동거지들이 실은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내재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자폐증, 혹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는 ‘무지’는 사라졌다.
하지만 “버릇없는 아이들”이라는 핀잔은 아직도 부모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담고 있다. 1964년 발표된 로알드 달의 동화 ‘찰리와 초컬릿 공장’에도 “계집애의 버릇은 저절로 나빠지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결국 자녀의 버릇은 부모 책임이라는 얘기다.
요즘 아이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버릇이 더 나빠졌는지, 버릇이 나쁜 아동들의 수가 정말 늘어났는지 알 도리는 없다.
돌이켜보면 부모들이 제 책임을 다하지 못해 차세대의 주인공들을 중대한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개탄의 목소리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미국의 어린이들이 자기 운동화 끈조차 혼자 매지 못하는 응석받이로 자라고 있다며 한숨을 쉬는 어른들도 똑같은 지적을 받았던 세대에 속한다.
탈세혐의가 드러나 부통령직을 중도하차한 스피로 애그뉴는 재임시절 새로운 육아론으로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 부모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소아과 전문의 벤자민 스포크 박사가 “아이들 버릇을 다 망쳐 놓았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전의 엄격한 훈육방식과 결별을 시도한 스포크 박사를 비난한 것인데, 이때 “버릇이 없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던 어린이들이 바로 요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다.
어린이들의 필요와 욕구에 반응하면서 이들의 좋은 성품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어느 시대, 어떤 세대에게나 지난한 일이다.
무슨 일을 하건 가끔은 실수를 하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반성하고 노력하는 것 또한 인간의 영역이다.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일에 백가쟁명의 논의가 일어나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이 박사의 결론이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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