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근혜는 누구… 출생에서 대선후보가 되기까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여러모로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올해 말 대선에서 전직 대통령의 자녀로서는 처음으로, 또 여당의 후보로 대선에 나서는 최초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시절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해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 뒤 이번이 두 번째 대선 도전인 박 후보가 만약 올해말 대선에서 국민들
의 선택을 받을 경우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가 모두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출생과 학창 시절
‘인간 박근혜’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1952년 2월2일 군인인 아버지 박정희 전 대 통령과 어머니 육영수 여사 사이의 2녀1남 중 장녀로 대구 삼덕동 셋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재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35세, 초혼인 육영수 여사는 27세였다. 이후 박 후보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와 박 후보는 1958년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자 서전에서 “모래주머니놀이, 고무줄놀이, 공 기놀이 세 종목을 두루 잘하면 동네 골목 대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골목대 장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했다.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를 보면 박 후보는 요즘 표현으론 ‘엄친딸’이었다.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 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2 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내내 반장을 맡았다.
장충초등학교 시절에도 특별히 어느 한 과목에 치우치지 않고 전 과목에 걸쳐 고 루 성적이 좋았다.‘ 우’가 많았던 4학년 때 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학년의 과목에서 ‘수’를 받았다.
박 후보는 성심여고를 거쳐 1970년 서강 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역사 학과에 가기를 희망했지만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 고 했다. 10월 유신의 해인 1972년 대학가 에 반정부 데모가 고조되던 때에는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대학 시절 성적은 4.0만점에 3.82점을 기록했다.
■영애에서‘ 퍼스트레이디’로
박 후보는 아버지가 1961년 5ㆍ16 군사쿠 데타를 주도한 뒤 2년 뒤인 1963년 대한민 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13세의 나이 로‘ 영애’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박 후보는 그해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문 세광에게 저격당해 서거했다는 소식에 급 거 귀국, 약관 22세에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박 후보는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때의 심경을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기록했다.
이후 1979년 10ㆍ26 사태로 아버지를 잃 을 때까지 5년여간 퍼스트레이디 대행은 계 속된다.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가 기업체 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을 나설 때 수행했 고 매일 아버지와의 아침식사 때 조간신문 을 읽어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아버지의 생 각을 물었고 자기 의견을 얘기했다고 한다.
■10ㆍ26과 18년간의 칩거
박 후보는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30 분께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는 전화를 받고 온몸이 얼 어붙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김계원에게 저격 당시 상황을 간단히 들은 박근혜는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김 계원은“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고 답했다.
박 후보는 10ㆍ26 이후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와중이던 1979년 11월 27세의 박 근혜는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청와대 를 떠나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이후 성북 동 자택 등에서 무려 18년간 사실상 칩거에 들어간다. 이 기간에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 니거나 서적을 탐독하며‘ 훗날’을 준비한 것 으로 알려졌다.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영남대 학교 이사장 등을 맡아온 시기이기도 하다.
■정계 입문, 2007년 대선 경선 패배
박 후보는 18년간의 ‘칩거’ 이후 46세인 지난 1998년 4월 대구 달성에서 치러진 15 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2000년에는 총재 경선에서 이회창 전 총 재에 이어 2위로 부총재로 당선됐다. 2001 년 상향식 공천, 당권ㆍ대권 분리 등을 골자 로 한 `7대 당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 래연합’을 창당했다.
2002년 복당한 박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 에 대한 탄핵 역풍 등으로 풍전등화의 위기 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천` 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이어 치러진 4ㆍ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 고 1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열 린우리당을 상대로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 선거에서 완승을 이끌어냈다.
2007년에는 첫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당 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하면서 분루를 삼켰다.
■‘대세론’으로 부활
경선 패배 이후에도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로 이른바 ‘대세론’을 형성, 당내 친 박(친박근혜)계의 정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대표적인 것이 2009~2010년 정국을 달 궜던 세종시 수정안 논란. 이 대통령 과 달리 박 후보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했다.
그는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 궐선거 패배 이후 홍준표 대표가 사 퇴하면서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2012년 4ㆍ11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 고 152석을 차지하는 대역전승을 거 두며 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입지를 굳혔고 8월20일 새누리당 전당대회 에서 마침내 대선 후보에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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