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띄엄띄엄 힘없이 내리는 빗방울이지만 반갑다.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마음도 메말라지는 것 같았다. 자동차 배기가스로 부옇게 지친 윌셔 대로 위의 하늘을 볼 때마다 우중충한 심정이 되었다.
비가 내리니 반가워서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비를 맞았다. 방사능 물질, 매연으로 오염된 빗방울이라는 사실은 일부러 외면했다. 그냥 언제나 맞고 싶은 것이 비다. 여름에 내리는 비로 인해 한 사람이 떠오른다.
4살 때였다. 할머니는 큰 대바구니를 들고 나를 데리고 뽕잎을 따러 가셨다. 안개같은 비가 내리던 초여름이라 살아있는 모든 식물은 무성했다. 할머니는 뽕잎을 따고 나는 뽕밭 옆의 실개천에서 새로 산 꽃고무신으로 물장난을 하였다. 어느새 주변은 비안개로 젖었다. 사방은 초록이라 이슬비가 초록빛처럼 환상적으로 보였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자 할머니는 뽕잎 따는 일을 그만두고 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평소 지병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할머니는 그 날로 자리보전을 하셨다. 세찬 여름비를 맞아서 병세가 심해진 탓일 것이다. 말복의 무더운 날 돌아가셨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기 전이라 영문을 몰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도 살림을 돕던 금산댁을 놀려먹었다. ‘옛날에 금산댁 동산에 메기 같이 …’어른들이 쉬쉬하며 노래를 못하게 했다. 슬그머니 할머니는 완전히 잊혀졌다.
그 후 오랜만에 만나는 일가친척들은 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할머니가 너를 각별히 애지중지했다. 젖 먹을 때만 빼고 할머니가 끼고 살았다”고 했다. 친척들의 그런 말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할머니가 넘치도록 사랑하던 옥이가 너냐? 할머니가 미스코리아 났다고 동네방네 떠들던 옥이란 말이냐”라며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잦으니 스스로 ‘나는 좀 못 났구나’ 여겼다. 세상의 모든 손녀 중에 미스코리아 감이 아닌 사람은 없을 터이다.
일가친척들이 전하는 말을 종합하여 할머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할머니는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총명한 분이다. 바지런 하시다. 등잔불을 켜놓고 자주 밤을 새우며 두루마기를 비롯한 옷들을 척척 만들어 집안 식구들의 입성을 단정하게 하신다. 일년에 열 번이 넘는 제사 때마다 상에 오르는 음식은 항상 정성스럽고 정갈하다. 특히 제사상에 오르는 문어를 오려서 무늬를 만드는 솜씨는 출중하다. 손으로 만드는 모든 것에 재주가 넘친다.
할머니가 낳은 고모들이나 삼촌들에 비추어보면 외모도 무척 아름답다. 사람들이 할머니를 회상할 때 보면 하나같이 무척 존경하여 심지어 경외감을 가진 것 같다. 본부인이 죽어 재취로 오신 할머니는 본부인의 아들이 낳은 손녀인 나와는 피가 섞이지 않았다.
이십대 초반의 어느 날, 사람들로 부터 칭송받는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인식이 든 후 부터는 지금도 할머니를 회상할 때마다 가슴 속으로 행복감이 퍼진다.
대학을 졸업한 후 갑자기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을 즐긴다고 억지를 부린 것은 할머니의 사랑이 나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이성과 교제를 할 때도 신중하였다. 사람을 무척 가렸다. 나라는 존재를 연애 신파극의 불행한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를 통하여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말하는 방법이 있음을 알았다. 주변의 일가친척들이 할머니를 추억할 때 마다 꼭 나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때때로 가슴 속 어디선가에서 ‘아가야, 사랑한단다’라는 할머니의 말이 들려오는 듯하다.
사랑의 힘은 질기며 강하다. 생명력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이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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