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의 그림
‘너무나 크고 높은 그 키 때문에 수화는 더 많은 슬픔과 아픔 속에 살았다./
왼 세계를 안을 듯 길고긴 두팔/
파리를 걷고 스페인을 가고/
또 아메리카의 지붕 밑에 살아도/
수화는 활보하는 한국사람/
수화는 공존하는 코스모폴리탄/
수화는 갔다. 아니/
수화는 돌아오고 있다./
기린처럼 긴 목을 쳐들고/
고국 땅 서울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서울의 보도 위를 성큼성큼 걸으며/
연상 파이프를 피우고 있다./’
한국 근대 회화의 선구자. 남관, 유영국, 이규상 등과 더불어 한국 추상미술의 효시를 이룬 국내화단의 거목이었고 국제화단에서 명성을 날린 미술가. 수화 김환기가 뉴욕에 뼈를 묻은 1974년 7월 평론가 이헌구가 쓴 ‘기린 수화는 가다’의 한 귀절이다.
1963년부터 1974년 타계할 때까지 만 11년간 뉴욕에 살며 그의 만년 작품들을 정열적으로 생산하고 웨체스터에 뼈를 묻었던 화가 김환기를 뉴욕의 올드타이머들은 당대의 멋쟁이, 천재 화가로 기억하고 있다. 70년대 중반 필자에게 들려온 김환기 화백의 뉴욕소식은 한발 늦은 시기였다. 그는 이미 유명
을 달리 한 고인이었고 어렵사리 수소문해 찾은 그의 아틀리에는 작달막한 키에 단정한 모습의 미망인 김향안이 지키고 있었다. 맨해튼 73가 컬럼버스 애비뉴와 앰스터댐 애비뉴 사이에 있는 아파트 건물 1층의 두 방을 터서 넓게 만든 공간이었는데 한쪽은 곧 유령이 나올듯한 목공소 분위기였다. 길다란 작업대 위에 여러가지 공구들이 널려 있었고 누군가가 방금 전 작업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듯한 느낌의 작업실이었다. 그 현장을 몇년째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 전 목재를 사서 문짝을 짜듯 손수 속틀을 만들었어요. 목공소에 맡기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목수일까지 손수 했어요. 속틀을 너무 무겁게 만들면 캔버스가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되도록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며 손수 짰어요. 속틀을 메운 다음 아교를 칠하고 정성들여 만든 빛깔들로 점을 찍고 그 점들을 네모꼴로 한번, 두번, 세번 둘러싸는 작업을 밤새 해나갔어요.” 이른바 점화라고 부르는 60년대 후반 김환기의 독창적인 기법의 작업장면을 설명해 주었다. 한때 홍익대에서 교편을 함께 잡았던 이경성은 수화의 점화 기법에 대해 “50년대 파리에 머물 때만 해도 마음은 한국에 있어서 산, 달, 구름, 항아리를 그렸다. 그런데 뉴욕에 정착해서는 현대문명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마천루를 점과 선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1913년 출생한 김화백은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해방후에는 서울대 및 홍익대 교수를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56년부터 59년까지 3년간 파리활을 했던 그가 뉴욕에 정착한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1963년 브라질에서 열린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측 대표로 처음 참가하여 회화부문 명예상을 수상하고 귀국길에 뉴욕에 들렀던 것이 이곳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라커펠러 재단이 아시아 문화발전을 위해 설립한 아시아 하우스를 통해 작품활동과 전시회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하우스와 타스카 화랑, 포인덱스터 화랑들에서 전시회를 열며 자연스레 뉴욕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의 뉴욕시대를 특징짓는 점화의 본격적인 면모는 70년대에 들어와 꽃피웠다. 매디슨 애비뉴의 화랑들이 관심을 나타냈고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 전시회를 통해 작품들이 제법 팔려나갔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공간’지 미술시평에 기고한 글에서 김환기의 뉴욕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뉴욕에 정착하면서부터 엄청난 변혁을 시도했음은 작가의 일련의 캔버스 화폭을 보면 당장 발견할수 있다. 서울시대까지 지속되었던 두꺼운 마티엘 화면이 사라진 대신 화폭에 엷게 물감이 번지면서 스며들게 하는 수법들이 등장하면서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지워져 갔음이다. 어떤 대상을 연상케 하는 형상이 아니라 순수한 추상적인 도형으로서 선이나 원이나 사각 같은 요소들이 화면을 채우면서 순수색면 추상을 드러내 주었다.“
미국의 장엄한 대자연을 특별히 사랑했던 그는 작품 스케일도 점점 키운 나머지 대작 위주로 그려나갔다. 한해 평균 대작 10폭 정도를 그렸는데 남들은 60이 넘으면 작품의 크기를 줄이는 판에 그는 거꾸로 대작을 고집했다. 하루 10여시간씩 캔버스에 매달리다 보니 운동부족에다 무리를 거듭한 셈이 되었다. 손에 마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목 뒤에 디스크까지 생겨 끝내는 수술을 받았다. 회복단계에서 침대에서 떨어져 뇌출혈을 일으킨 것이 원인이 되어 74년 7월25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웨체스터 카운티의 바랄라 공동묘지에 조용히 묻혔다.
김화백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아틀리에에서 미망인으로부터 ‘마로니에의 노래’라는 수필집을 받고 알게 된 것은 변동림이란 처녀시절 이름을 가진 그가 경기여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중퇴하고 파리로 유학가 솔본느와 에끌 드 루브르 대학을 다녔다는 것,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18세때 시인 이상과 만나 동거하다 이상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임종을 지켰다는 사실, 이상이 타계한 후 독신으로 지내다 1944년 김화백과 만났고 60년대 뉴욕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사실 등이었다. 이후로 필자가 몸담고 있던 언론에 그의 향기 나는 수필 여러 편이 실린 적이 있었다.
두 천재의 반려자로서 문화예술인들과 폭넓은 교제를 했던 김향안은 수필가로서도 필명을 날렸으며 뉴욕에서는 백남준 등과 더러 만나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김화백이 사망한지 꼭 30년만인 지난 2004년 2월29일 향년 88세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한동안 웨체스터에 묻혔던 부부의 유해는 김화백이 세상을 떠난지 36년만인 지난 2010년 고향인 신안군 안좌면에 이장되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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