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간의 여름학기가 끝이 나고, 마이애미에서 1주간의 달콤한 휴식을 취한 뒤 버클리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 멍하니 비행기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던 중,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도착지인 피닉스 공항이 심한 모래 폭풍으로 인해 잠시 문을 닫았기 때문에 텍사스의 엘 파소 공항에 일시적으로 착륙한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머무르게 될지는 모른다고 했다.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여행을 자주 다녀보았지만 비행기가 예정 도착지 외 다른 곳에 착륙한 상황은 처음인지라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겁이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행이 주는 설렘이 다시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으로 대체될 것이라 예상하던 찰나에 이런 갑작스런 일이 일어나서 내심 반가울 뿐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피닉스 공항에 너무 늦게 도착할 시 갈아타야 하는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항공사에 전화해서 혹시 모르니 다음날 아침 7시 비행기를 임시 예약해 두었다. 약 한 시간 뒤쯤 비행기는 다시 피닉스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다음 비행기 이륙 시간까지 딱 10분이 남아 있었다. 한밤 중 고요한 공항에서 짐가방을 끌고 전력질주를 해서 겨우 탑승구에 도착한 순간,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털레털레 고객지원센터에 가서 다음 비행기 편 티켓을 발권하고 곧바로 공항 근처 호텔을 예약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해 방에 들어오니 무려 밤 11시. 피로가 몰려와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다음날 아슬아슬하게 아침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클리에 도착해 너무나 익숙한 내 방에 들어오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피닉스라는 곳에서 이제 갓 스무 살 된 여자 아이가 혼자 한밤중에 길을 배회하는 처지가 됐었다니. 생각만 해도 위험하고 무서운 상황이었지만 나는 무서워하기는커녕 마냥 재미있어 했었다. 이젠 이런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일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갈 수 있게 된 나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이와 같은, 혹은 이보다 더 심각한 예상치 못한 일들을 내가 스스로 처리해나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어른이 된다는 것이 수반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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