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가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이 대학 사학년때 신입생이었던 며느리를 만났으니 어느새 십년의 세월을 함께 한 사이이다. 그간 수시로 언제 결혼하냐고 채근을 해도 별 대답을 안했는데 직장을 잡은 후 저희끼리 프로포즈하고 약혼했다고 하면서 어느 어느날 결혼하겠다고 통보를 보내왔다. 우리 때는 비록 당사자들이 하겠다고 결정은 했지만 주위의 어른들이 거의 모든 걸 챙겨주어서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하다보면 결혼식이 끝나 있었는데 애들의 혼사에 신랑엄마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옷 차려입고 식장에 가서 앉아 있다 밥 먹고 온 것 밖에는 없다. 그러는 동안 애들은 장소선정에서 부터 청첩장, 예복이며 꽃과 음식, 케익, 음악, 사진사 등, 수십가지를 자기들이 의논해서 동동 뛰어가며 장만해 예식을 치루는 걸 보며 저렇게 힘들게 결혼해서는 정말 잘 살아야야지 안그럼 들인 공이 억울할 것 같았다.
작은 아이는 태어 날 때부터 참 내게 많은 것을 준 아이였다. 몸이 아파 검사하러 갔다가 임신한 걸 알았고 그 때 웬일인지 너무 그 아이가 갖고 싶었기 때문에 임신 내내 무지 고생을 감수하며 아이를 낳았다. 딱해서 그랬겠지만 저렇게 해서까지 아이를 가질 건 뭐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주위에 폐도 많이 끼치고 고생도 엄청 했다. 아이를 낳고 애만 퇴원시키고 나는 수술실로 갔는데 한달 후에 퇴원해 아이를 옆에 뉘어 놓고 몇달을 함께 누워있었다.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이 아리고 애처러웠다. 그 때 아이는 그저 존재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 너무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특별한 인연이란 게 있는건지 아이의 결혼식 3주전에 다시 수술을 받게 되었다. 내 바람은 오로지 무사히 결혼식에 참석하는 거였다. 신주단지 모시듯 내 몸을 달래며 이게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있는 인생살이에서 마지막 넘는 깔닥고개라고 내게 주문같이 뇌었다. 들숨 날숨 한번이 힘겹게 느껴질 때 아이는 또 한번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구해주는 듯 했다.
몸을 추스리는 동안 한편으론 누구를 청해야 하는지,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행여나 부르지 않은 게 섭섭하다고 할 분은 없는건지.. 조심스런 걱정을 했다. 어떻든 이렇게 치룬 식이 너무도 흡족하게 끝났다.
결혼생활을 해본 이들은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이지만 남남이 만나 자식 낳고 일생을 함께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제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그들 앞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모든 일이 끝난듯 홀가분하다. 지금부터 잘 살고 못살고는 그들만의 문제일 것이다.
젊었을 때는 삶에서 학술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무언가를 이루고 성취해내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줄 알았다. 좋은 일도 어려운 일도 겪어낸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아마도 내게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고 짝 지워 보내는 것이 가장 의미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어떻게 쓰여있는지 모르지만 오래 전 천주교 교리책 제일 첫문제가 사람은 왜 태아났느뇨, 주님의 영광을 들어내고 영생을 얻기 위함이니라, 라고 했던 것 같다. 이제는 친구들과 둘러 앉아 사람은 왜 태어났느뇨, 자식 낳고 짝지워 보내려 왔느니라, 하며 장난삼아 찧고 까불게 되었다.
자식 없는 신부님 수녀님들은 어쩌라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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