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왔다. 엊그제 이민을 왔다는데 무언가 자문을 받고 싶다는 얘기였다. 이런 농담으로 찾아온 이 친구는 현대 한인 미주 이민사의 성공 케이스 표본이 될 수 있는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있는 이 지역 올드타이머 코리안 아메리칸인 그였다.
“나 엊그제 이민 왔어.” 농담조로 말한 처음과는 달리 두번째 이말을 다시금 되풀이할 때는 무언가 정말 다른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목소리도 가라 앉은채 약간 떨리는 듯 했다. 어렴풋이 눈에 섬찟 비치는게 ‘이 친구 우나 보다.’ 심상치 않은 이 상황을 대중 사무실에서 계속 마주할 수는 없었다.
“옛날 수없이 이 길을 같이 달렸었지...” 누가 이길로 가자고 한 것도 아닌데 차는 하이웨이 101 남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 속에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했다. “전부?" "Yep, 전부, Everything, including wife." 차가 곤두박질 할 뻔 했다. “왜, 무엇 때문에?” 시작은 조그마한데서부터 시작된 모양이다. 짜증, 언쟁, 대개의 부부가 문제가 생겼을 때의 가는 수순이다.
돈 문제라고 했다. 무리한 투자. 그리고 다가온 불경기. 당연히 빚쟁이들한테 시달리기 시작했다. 은행 빚. 은행으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어음을 들고 괴롭히는 Collection Agency 악마들(그의 표현). 엎친데 덮친격으로 IRS의 으름짱. 생전 처음 이런 시달림을 견디지 못한 마누라는 빗발치는 전화의 공포를 피해 단칸방 아파트로 혼자 이사 나갔고 상황은 악화 일로로 눈덩이 같이 불어나서 급기야 파산, 이혼으로 치달리게 되었다고 했다.
“한 세상 산다는 거 별거 아닌데...” 몬트레이 캐너리 로우를 지나 패시픽 그로브 Lovers Point 주차장에도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혼까지는 잘못된 거다. 누군가가, 아니 둘 다 모두 끝끝내 참았어야지...”
파산이 끝났을 때 남은 거라고는 산속의 집 한 채와 살림도구 등등이었다. 그다음 이혼이 끝나고 남은 것은 오랜 세월과 추억이 담긴 그 집을 팔아 이제는 ‘전’ 자가 붙는 마누라가 여생을 보낼 조그마한 타운 하우스 하나 장만해 주고 자신이 갖는 100불짜리 지폐 100장을 제한 나머지 전부를 주었다고 했다. 늙은 할망구가 혼자서 돈이나마 있어야 어쩌고 한다면서 다 주었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인제.” 엊그제 새로 이민 왔다는 말을 또 한번 했다. 방금 온 이민자니까 아무거나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이민 보따리를 풀고 보니 이 나라가 전혀 생소하지 않아서 좋았고 언어의 불편도 없어 좋았고, 그야말로 한번 뭔가 해볼만한 자신이 듬뿍 생겼다나? 더구나 먹여 살려야 할 자식들도 없고 눈치를 볼 마누라도 없으니 얼마나 편하고 홀가분 하냐고... 자기몸 하나만 챙기면 되니 이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책임감이 없는 자유를 얻은 기분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더니만 어느새 잠잠하게 현실로 받아주는 것 같다고 했다. “...결국 그것들은 여기 양키 족속들이니까.”“그런데 아무래도 나 또 한번 이민해야 될 것 같아.” 그가 늘 말하던 어느 섬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의 고향이다. 옛날 친구들이 아직도 몇몇 남아서 고향땅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아직 몸이 건강하니 뭔가 해서 친구들과 어울릴 막걸리 값이야 좀 벌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러나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깡통을 찬 털털이 인생이니 늙고 혼자서 혹시 불구라도 된다면 같은 돈을 준다면 한국의 시설이 낫지 않겠냐고...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추한 꼴을 양키 자식들한테 보이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고... “...그러나 그 꼴이 된다면 이 세상 훌적 떠나는게 여럿을 위해 좋을텐데...”
돌아오는 차 속에서 잠꼬대 같이 그가 뇌까리고 있었다. 우리 이민사의 Chapter 하나가 이제 넘어가기 시작하나보다. 미국의 일본사회와 같이 이민자 1세들의 숫자는 줄어가기 시작하나 보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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