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 심은 울타리 감자꽃이 하얗게 담을 뒤덮었다. 담장을 따라 드문드문 심었는데 절로 열심히 자랐다. 오른편 담장을 십자수처럼 어여쁘게 수놓았다. 눈처럼 흰 별사탕 꽃잎 중심에 노란 술이 박힌 울타리 감자꽃은 하늘거리다가 바람이 좀 거세지면 눈송이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철사 줄처럼 가는 줄기 탓에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꽃무더기는 피어나는 안개처럼 상념에 젖게 만든다. 이렇듯 생명이 있는 것은 성장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터울이 한참 지는 언니들과 막내를 뺀 세 남매가 모두 한살 반 터울이었다. 바로 위인 오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지물포에서 갱지 전지와 끈으로 묶을 수 있는 종이 흑표지를 사오셨다. 전지를 반듯하게 자르고 또 잘라서 카피용지 크기의 16절지를 만드셨다. 연필을 잡을 수 있는 세 남매에게 흑표지 연습장을 만들어 주셨다.
연습장을 다 채워 가면 열심히 공부한 것에 대해 대견해하며 칭찬하셨다. 백지가 너덧 장 남짓 남았을 때 흑표지 끈을 풀어 다 쓴 종이는 빼고 새 종이로 채워주셨다. 때로는 글씨 쓰기가 편하게 대나무 자를 대어 반듯하게 줄도 그어주셨다.
크레용도 귀한 시절이라 여동생은 빨강과 파랑 두 가지 색연필로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글자를 깨쳐 베껴 쓰기 하는 도중 여동생을 쳐다보면 그림을 그럴듯하게 곧잘 그리는 것이다. 동생은 저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데 나는 왜 못 그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다. 여가시간에 그때처럼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굽는다.
학령 전 어린 소견에도 나에게는 화가의 재능은 없다고 판단되어졌다.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이 버릇인 내가 연습장을 제일 늦게 채웠던 것 같다. 하지만 한 번 들은 말은 잘 기억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듣는 집중력은 있었다. 벼라 별 상상을 다하는 상상력도 풍부했다. 언니는 온갖 것을 기억하며 공부도 잘 한다고 동생은 오히려 날 부러워했다.
지금도 엉뚱한 꿈을 꾸는 버릇은 여전하다. 요즈음 자주 하는 상상은 이런 것이다. 그림 그리는 것은 재능이 없지만 글씨는 집중해서 쓴다면 가지런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내가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 태어났고 직업을 마음대로 택할 수 있어 성경 필경사가 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시간을 뒤로 돌려 중세의 성경 필경사가 되어 낮에는 환한 곳에 앉아서 성경말씀을 잉크를 묻혀서 쓰고 밤에는 호롱불 아래에서 나무나 석판에 성경말씀을 새기면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주는 무한한 영감을 받고, 대할 때마다 다른 깨우침을 얻고, 베끼면서 완벽한 글쓰기의 전범을 즐기고, 성경책이 만들어지고, 생활의 방편이 되고… 한가한 때 종종 이런 공상의 나래에 잠겨 혼자서 행복해 한다.
정월부터 허황한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지만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올해의 목표이다. 읽을수록 읽은 만큼 내면이 점점 강하여지고 살면서 부딪히기 마련인 세상사 어려움과 갈등이 하찮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지라도 성경을 읽고 정금처럼 단련되고 은처럼 깨끗하고 맑게 다듬어지는 삶이 되기를 꿈꾼다.
반듯하게 자른 갱지를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흑표지 속에 넣어 단단하게 묶어주신 아버지의 염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일생동안 알아가고 깨우치고 배워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손수 보여주신 것이다.
삶의 여정에 가로놓인 인생의 의미, 인간의 가치, 삶의 고뇌는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는 각자의 몫이고 세상 끝 날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과제로 계속 배워나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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