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주가 90도를 넘나드는 어운 날이다. 아론이네 식구가 다녀간 집은 마치 전쟁터 같이 들쑤셔져 있다. 아론이 녀석 이젠 다 큰 것 같이 제법 짤짤거리고 다니며 이곳저곳 참견하며 웬만한 말귀는 다 알아 듣는다. 할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며 안녕하세요 인사하라 하면 고개를 꾸벅 거리고 사진을 어루만지며 씩 웃는다. 그 웃음이 할아버지의 그 웃음과 어찌나 닮았던지... 그이가 많이 아플 때 백일이 갓 지난 아론이를 안고 “아론아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다”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다음 달엔 아론이 동생이 태어나고, 12월엔 둘째 재우네서 첫 아이가 태어난다.
이 아디들 손자, 손녀 재롱을 나 혼자 보자니 먼저 간 그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집안을 다 치우고 마당에 나왔다.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고 채송화가 만발했으며 페츄니아가 보기 좋게 피어 있다. 그이가 있었다면 더 보기 좋게 더 많이 가꾸고 다듬었을 걸.
지난 겨울엔 생각했었다. 봄이 되면, 해가 길어지면 지금보다 마음이 많이 안정 될꺼라고.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점점 더 마음이 아려오고 미안한 생각만 들고 서성거리게 된다.
그리고 그이가 아프기 전 둘이 생각했었다. 아이들 다 결혼시킨 뒤 한국으로 돌아가 조용한 시골에서 지낼까 하고.
그러나 그런 날이 오기 전에 그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가루가 되어 땅에 묻히고 나니 내 여생은 불가사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 눈 팔 곳도 샐 구멍도 없이 막힌 길이나 다름 없어졌다.
나는 그 빠져 나갈 수 없는 통로에 문득문득 공포를 느낀다. 그건 죽음의 공포와는 또 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따분한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이렇게 메마르고 삭막해도 되는 것일까.
이제 곧 그이의 1주기가 돌아온다. 한국에 있는 동창 혜경이와 의숙이가 때 맞춰 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며 추모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를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이젠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도 그 방향을 가늠해 나가야겠다. 그래서 오랜 장마가 갠 날, 새벽 하늘의 아름다움과 같은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어디에선가 읽은 글이 생각난다. “이제는 보내 드리십시오. 사랑의 기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문을 닫으십시오. 그분은 지금 천국에서 행복하십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잊히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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