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의 섬 푸에르토리코는 지금부터 111년 전인 1898년 미국에 귀속됐다. 400여년간 스페인 지배를 받아오던 이 섬이 미국령이 된 것은 스페인과의 식민지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다.
대부분 사탕수수 농업을 하는 가난한 농부들이었던 이 섬 주민들의 미국 본토 이주는 1917년 시민권 부여로 자유왕래가 가능해지면서 시작됐고, 2차 대전 종전 후 풍부해진 일자리를 쫓아 건너온 푸에르토리코인들이 급격히 늘면서 이주 러시가 본격화됐다고 한다. 현재 미국내 푸에르토리코계의 수는 250만명을 넘고 있는데 이중 40%가 뉴욕 지역에 몰려 있다는 통계다.
뮤지컬과 영화로 유명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 나오는 뉴욕의 빈민지역이 이들의 주된 정착지였다. 가난과 범죄라는 스테레오타입에 시달리며 차별의 굴레를 안고 살아온 이들 커뮤니티는 그러나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딸인 소니아 소토마요 판사가 지난주 ‘법조계의 별중의 별’ 연방 대법관에 공식 취임하는 모습에서 ‘아메리칸 드림’ 실현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했을 것이다.
소토마요 판사가 데이빗 수터 대법관의 뒤를 이를 후보로 지명되면서 그녀의 드라마틱한 개인사가 주목을 받았다. 가난한 노동자였던 부친을 9세 때 여읜 뒤 빈민지역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남다른 모친의 교육열 덕분에 유명 사립고교와 프린스턴대를 거쳐 예일대 법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맘껏 꽃피울 수 있었던 그녀의 스토리는 여성으로서 최초의 히스패닉 대법관이라는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키기 충분했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최초의 대법관이 된 사람은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 변호사였다. 그는 1954년 공립학교 내 흑백분리 교육 철폐를 이끌어낸 역사적인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의 원고 측 변호사로서 흑인 민권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린 뒤 1967년 결국 자신이 대법관직에 올랐다.
마셜 이후 배출된 흑인 대법관은 현직인 클레런스 토마스가 유일하다. 서굿 마셜 대법관의 존재는 미국사회에서 유색인종과 소수계가 느끼는 유리천장이 깨뜨려질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중대사건이었다. 이후 4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에 이어 여성이자 히스패닉이라는 겹겹의 유리천장을 보란 듯이 타파한 소토마요 대법관의 상징성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자신의 인종이 부각되는 것을 싫어하는 클레런스 토마스와는 달리 히스패닉으로서의 정체성의 자신의 성공의 요인이 됐다고 당당히 말하는 소토마요 대법관은 그래서 더 빛나 보인다. 언젠가는 한인 대법관도 탄생해 아시안들이 느끼는 유리천장도 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김종하 / 사회부 부장대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