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와(1968~) ‘열무 구멍’ 전문
여러 날 뒤
텃밭에 나가 열무를 들여다보니
파란 잎사귀마다 별자리만큼 구멍이 박혔다
농약을 치지 않아
구멍은 탐스럽고도 싱싱하게 자랐다
구멍이 더 자라 허공이 되기 전
남은 구멍을 뜯어 물에 씻고 다듬는다
식탁 위 융숭하게 차려진 구멍들
무지렁이 벌레가 제 힘 다해
한세상 깊이
둥글게 통찰했다는 흔적
처음도 끝도 일원(一圓)이라는 벌레의 우주관
간다간다 해도 이 자리이며
도달했다 도달했다 해도 이 자리라는
텅 빈
숨통의
벌레가 남긴 구멍의 성찬식, 혀가 일어나 춤을 춘다
화자가 키웠던 것은 열무가 아니라 탐스럽고 싱싱한 구멍이다. 농약을 안쳤기 때문에 생긴 구멍을 자신이 키웠다고 능청을 떠는 것이다. “식탁 위 융숭하게” 차릴 정도로 ‘구멍 농사’를 잘 지은 셈이니, 발상치고는 참으로 독특하다. 벌레가 한 세상을 깊이 통찰했다니, 예사롭지 않게 미물을 대하는 마음이라야 이런 시를 짓는다. 불현듯 무공해 구멍들을 키울 수 있는 텃밭 하나 가꾸고 싶어진다.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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