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3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나이 지긋하신 한 할아버지가 편집국에 전화를 걸어 “왜 기사제목에 ‘압류’라는 우리말을 쓰지 않고 ‘차압’이라는 일본말을 썼나. 기자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느냐. 앞으로 조심하라”고 면박을 준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차압’이 일본식 한자라는 사실을 알고 사용을 자제하는 한인이 언론계 종사자를 포함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한동안 궁금했다.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한자어의 상당수는 일본식 한자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무늬만 한국어’인 일본말들이다. ‘구좌’‘축제’‘견습’ 부지’ ‘할증료’‘가처분’‘화기애애’ ‘고참’‘납득’‘각서’‘면회’ ‘세대’‘수당’‘면회’‘곤색’ 등이 바로 그런 낱말들이라 할 수 있다.
많은 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요지’(이쑤시개) ‘뗑깡’(투정) ‘똔똔’(본전) ‘다대기’(다진 양념) ‘유도리’(융통성) ‘가라’(가짜) ‘와리깡’(각자내기) 다마네기’(양파) ‘다꾸앙’(단무지) ‘조시’(몸 상태) ‘에리’(옷깃) 같은 완전한 일본말도 있지만 한국말인지 일본말인지 조차 모르고 사용되는 낱말도 부지기수이다.
지난해 1월 미인대회 입상자 출신인 한국의 한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방송 도중 ‘쿠사리’라는 일본말을 썼다가 공동 진행자에게 ‘그건 일본말이다. ‘면박‘ 또는 ‘핀잔‘으로 순화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을 당하자 계속 한국말이라고 우기다가 결국 잘못을 시인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작년 11월에는 한국의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과학기술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만땅’(가득) 이라는 일본말을 게재했다가 “우리말 사랑에 앞장서야 할 교육부가 어떻게 일본말을 버젓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느냐”며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적도 있었다.
한국 국방부의 경우 지난 여름부터 국방일보에 ‘병영생활 바른말, 고운말’이라는 코너를 신설, 군대에서 많이 쓰이는 일본말 청산 캠페인을 펼치고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일제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63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말 속에는 아직도 많은 일본말이 남아있다. 3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한국 땅에 ‘그들의 언어’를 확실히 심어놓고 돌아갔다.
‘생활 일본어’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연령에 상관없이 같은 한인들끼리 서로 말이 안 통할 정도니 말이다. 바다 건너 미국에 이민 와 사는 한인들은 어떤가.
약 7~8년 전 미국에 이민 온 LA거주 30대 한인여성은 “ ‘다대기’가 일본말인 줄 최근에야 알았다”며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 일본말이 그렇게 많은 줄 상상도 못했다. 무엇이 한국말이고 무엇이 일본말인지 공부를 좀 한 뒤 가능하면 일본말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영어의 나라에 살기 때문에 한국보다는 정도가 덜하겠지만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 때 이민 온 1.5세들도 가정에서 외국어 교육을 잘 받았는지 일본말 구사능력이 수준급이다.
특히 일제시대를 경험한 부모 또는 조부모 밑에서 일본말을 매일 들으면서 자란 한인이면 더더욱 그렇다. 집에서 어른들이 한두 단어 건너 일본말을 쓰니 자연스럽게 일본말을 한국말로 알고 사용했을 것이다.
부모 또는 조부모 못지않게 일본말을 남발하는 젊은 층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은 부모를 그대로 따라 하기 마련이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 어릴 적부터 입에 밴 일본식 표현을 하루아침에 고치는 것은 어렵지만 잘못된 점을 차근차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해야 되지 않을까.
후세들의 바람직한 뿌리교육을 위해서도 한국말 사랑은 필요하다고 본다. ‘한민족’의 정신이 일본에 의해 영원히 지배되는 것을 계속 방치할 순 없지 않은가.
구성훈 사회부장 직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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