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때 숭례문(남대문) 인근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당시 남대문시장에서 꽃 도매상을 하고 계셨던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기 위해 방과 후 숭례문을 지나서 시장 지하상가로 거의 매일 같이 뛰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거금이었던 백원짜리 동전을 고사리 손으로 받아 쥐고 어묵, 찐빵, 만두를 배가 두둑하도록 사먹었다. 넘치는 포만감과 함께 숭례문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렇게 서울에서 거주했던 모든 사람에게 크고 작은 추억거리를 마련해 주어왔던 숭례문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동안 숭례문 경비 체제가 허술해 조만간 누가 방화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여러 차례 제기됐는데도 불구하고 화재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기 그지없다. 방화가 확실시된 이번 사건에서 숭례문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숭례문은 오후 8시 이후에는 상주하는 관리인 없기 때문에 심지어 서울역 주변 일부 노숙자들은 숭례문을 집 삼아 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국보 1호인 숭례문에 변변한 방재 시스템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니 정말 할 말이 없다. 숭례문에는 스프링클러, 화재경보장치와 같은 기본적인 화재 안전장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는데, 유일한 소방장비는 누각 1, 2층에 4개씩 놓여 있던 소화기 8대가 전부였다고 한다.
국가 역사가 짧은 미국의 경우, 당국의 문화재 관리와 경비는 유별나다. 겉모습만으로는 큰 감흥을 주지 않는 200~300년 정도 역사의 인디언 유적지를 주립공원 등으로 구별해 24시간 레인저를 상주시키고 개장시간 외에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유적지로 지정한 지역에서는 작은 돌덩이 하나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겼을 경우 막대한 벌금을 징수한다.
지난 1818년 지어져 LA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다운타운 올베라 스트릿에 있는 ‘엘 푸에블로 데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건물 내·외부에 연기감지기, 불꽃감지기, 온도감지기 등 수십개의 감지기가 설치돼 있다. 화재가 발생하면 곧바로 이를 감지, 경보시스템이 작동하고 바로 화재 진압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가끔 한국을 방문하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숭례문을 구경한다.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지금 한국을 방문하면 뼈대만 남은 숭례문의 쓸쓸한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을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고 분한 생각도 든다. 하늘에 계신 할머니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실 것이다.
백두현
특집 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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