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에서 돌아 온 이철수씨와 그의 구명운동에 불을 붙인 이경원 전 새크라멘토 유니언 기자가 옛날을 이야기하며 활짝 웃고 있다.<이승관 기자>
“누명씌운 수사관 미워하지 않아”
91년 화재로 전신화상
최근 정부수당으로 생활
“단 한번도 저에게 누명을 씌운 수사관을 미워해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무죄평결 25주년을 기념해 열린 심포지움에 참석한 이철수(53)씨는 아직도 가슴 속에 공권력에 대한 증오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저 측은한 기분만 든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이씨는 무죄로 풀려난 후 정부를 상대로 피해배상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인종편견에 가득 찬 공권력에게 “코리안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자신의 20대를 고스란히 강탈한 인종차별적 사법제도를 용서한 그에게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이씨는 현재 UCLA노동연구소 소장인 켄트 웡의 주선으로 노조 조직책이란 첫 직업을 구했다. 그러나 자신을 구명해 낸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줄 때마다 결과는 좋지 않았고 뚜렷한 거주지 없이 LA와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다가 결국은 비극이 시작된 차이나타운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 요즘은 정부에서 지급하는 불구자 수당으로 겨우 생활한다고 있다고 전했다.
‘얼짱’이었던 외모는 지난 91년 샌프란시스코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으며 완전히 일그러졌다.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80년 대 본보의 이철수 사건 담당기자였던 변홍진씨는 “수술을 받아 많이 좋아진 것이 저 정도”라고 말했다.
벌써 오십을 훌쩍 넘겨 중년이 된 이씨는 9월3일 발간 예정인 자서전 ‘Voice from the Death Row’를 조용히 기다린다. 책 발간을 통해 한인들의 관심을 다시 결집해 아시아계 재소자들의 갱생과 재활을 위한 재단 설립이 소원이다.
<“아시안 인권 불지핀 계기”>
이경원 원로기자 회고
“당시 주류 기자들은 문화적 무지에 눈이 가려져 단 한명도 사건의 실체를 꿰뚫어 보지 못했어요”
이철수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이경원 원로기자는 사형수의 목숨을 살려냈다는 치하에 두 손을 내저으며 언론인들의 사명 완수 실패를 먼저 지적했다.
이철수 사건은 이경원 기자가 1978년 1월29일 새크라멘도 유니언지 1면 톱기사로 게재된 ‘차이나타운의 앨리스’란 특집기사에서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유죄평결은 잘못됐다”고 보도하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 남부에서 흑인인권운동 취재를 시작하며 기자로서의 잔뼈가 굵은 이경원 기자는 “흑인인권 운동은 로사 팍이란 흑인여성이 버스 승차거부에 항의하며 시작됐고, 아시안 인권운동은 이철수 사건을 계기로 불이 붙었다”며 “자라는 젊은이들이 사건을 사례로 범아시아권 단결의 필요성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김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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