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음악을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90달러짜리 삼성 MP3 플레이어를 사준 일이 있다.(글을 쓰느라 영수증을 찾아 날짜를 확인해 보니 8월20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마치 틴에이저인양 그것을 끼고 살며 ‘힐러리 더프’니 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좋아했다. 그후로 몇 달이 흘렀다. 정확히는 추수감사절이었던 11월23일. MP3 플레이어가 집 안에서 홀연 사라졌다. 얼마 전에도 분명 보였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약 일주일 뒤에는 온라인 정보기술(IT) 전문매체인 ‘시넷’(CNET)의 선임 에디터로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낯익은 제임스 김씨가 사라졌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리고는 며칠 후, 그는 실종 11일만에 싸늘한 사체로 발견됐다. 오로지 가족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거의 아사상태에서 폭설에 갇힌 험준한 오리건 산악지대를 무려 16마일을 헤매며 초인적인 사투를 벌인 것도 헛되이.
디지털 기기를 평가하는 일을 하면서도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는 ‘아날로그적’ 가슴을 지녔던 재능 많은 한 젊은이가 불과 35세의 나이로 산 자의 땅에서 죽은 자의 땅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의 사망 소식은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을 애도하게 했고 기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아직 사건이 현재 진행형이었을 때 뉴스를 들으니, 아들을 살리려고 헬기까지 동원하는 부성애를 보였던 제임스의 아버지 스펜서 김씨는 수년 전 한 번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가 초청됐던 어떤 행사에서였다. 그의 회사 CBOL이 군수 관련 중견업체임을 알고 간곡히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한사코 거부해 기억에 또렷했다.
게다가 제임스 김씨는 다름 아닌 앞서 언급한 딸의 MP3 플레이어를 좋게 평가해 구입 결정을 내리도록 한 당사자였다. 실종 후 신문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여주니 딸도 “잃어버린 MP3 플레이어를 평가한 cnet.com 동영상에 나왔던 그 가이(guy) 아니냐”며 안타까워했다.
덧붙여 CNET은 기자가 가장 자주 찾는 웹사이트 중 하나였다.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지만, ‘진정한 영웅’인 김씨의 무사귀환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물같이 흘러가버린 그의 생애는 그렇게 나의 삶 한 갈피로 슬며시 스며들었다.
이번 사건을 돌이켜 볼 때, 세계를 울린 것이 불타는 가족애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가 재직했던 CNET이 보여준 ‘직원 사랑’ 역시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CNET은 실종 직후 웹사이트를 통해 사건전개 상황을 어느 뉴스 사이트보다 빨리, 상세히 전 세계에 타전, 메이저 언론들의 관심을 끌어냄으로써 당국이 구조 노력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또 친구가 개설한 웹사이트로 네티즌들을 연결해 주어 생환을 비는 기원을 한 데 모았다.
그리고 사건이 비극으로 막을 내린 직후에는 출생 및 사망년도를 적은 그의 사진을 웹사이트 첫 머리에 올리고 생전에 그가 나왔던 동영상들도 간추려 한 데 모아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칼럼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의 가족을 돕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보가 올라 있다.
물론 그 배경에는 김씨가 헌신적인 직원이었다는 점이 있었겠지만 CNET의 ‘인간중심 경영’정신을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다. 회사 없는 직원이 존재할 수 없지만, 직원 없는 회사도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딸의 MP3 플레이어도, 그것을 추천해 준 제임스 김씨도 사라진 우울한 세밑, 화려한 송년 분위기의 뒤안길에서 스산함을 느끼기 쉬운 종업원들을 따스하게 배려해 주는 한인 업주들이 많기를 기대해 본다.
<김장섭>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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