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의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의 상장사 1,555개 회사 가운데 그 이름이 영어로 표기된 회사는 전체의 63.6%에 해당하는 989개라고 한다.
꼭 통계수치를 안 보더라도 요즘 한국에서 길에 다니다 보면 한글보다는 영어 간판을 찾기가 훨씬 수월하다. 사람 이름도 마찬가지인데 해외 업무가 많은 회사원들 중에서도 외국인들이 기억하고 발음하기 쉽도록 영어 이름 하나쯤 만든 사람들이 많다. 어느 국내 대기업의 영업팀은 200여명의 팀원 전체가 영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자식이 태어나면 미신스럽긴 하지만 행여나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이름이 있을까 대한민국의 부모님들은 족보에서 돌림자를 찾고 획수를 세고 급기야는 작명소까지 찾아가서 이름을 짓는다. 그렇게 정성들여 지어진 우리식 이름이 필요에 의해서건 겉멋을 위해서건 서양식 이름들로 대체되어나가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참 서글프다. 하기야 대한민국 사회에서 광적으로 일고 있는 영어 교육 붐 현상과 안하무인격으로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영어를 사용한다는 현실, 그리고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주장마저 나온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그까짓 이름 쯤이야.
미국이란 나라는 “Melting Pot”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수많은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사는 나라이자 동시에 또 그 다양한 사람들이 한가지 문화로 녹아 사는 곳이기도하다. 다양한 민족들이 ‘미국인’이라는 동질한 정체성을 느끼며 사는 데에는 영어라는 언어가 큰 역할을 한다. “언어는 내 존재의 거울”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듯 언어에는 나의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녹아있고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동질한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사용하며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진 미국인들도 가끔 그들의 각기 다른 뿌리를 기억하기 위해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바로 이름이다. 얼마전 터키계 미국인인 필자의 한 동료는 최근 태어난 딸에게 터키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미국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 미국인 아버지와 스웨덴계 미국인 어머니를 가진 한 미국인 친구의 이름은 어머니를 위해 “울라”라고 지어졌고 나이지리아에 가본 적도 없다는 다른 미국인 친구 역시 부모님이 그곳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아데툰지”이다. 이렇게 보면 미국에서는 이름이라는 것이 또다른 “존재의 거울”이 아닌가 한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영국계 미국인이 아닌 타민족 출신 미국인이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Melting Pot”에 완전히 녹아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본인은 출신 국가 보다는 미국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언어나 문화적으로 아직 미국보다는 출신 국가에 더 가까운 사람들을 당연하거니와 완전한 미국인일지라도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영어 이름이 아닌 각국의 전통적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세계은행에는 백 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말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들도 많지만 그 이름을 버리고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 했다. 정 어려울 경우 영어권 사람들이 흔히 하듯 본인 이름에서 부르기 쉬운 부분만 떼어내던지 극단적인 경우 이니셜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의 중심부 워싱턴에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잘 살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인 사람이 서툰 영어로 본인을 “제니퍼”라고 소개하는 것은 외국인들에게 이상하게 비춰질 것이 당연하다.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배려’가 아닌 ‘사대’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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