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교과서들은 미국의 역사가 1607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적고 있다. 이 해 지금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첫 영국 식민지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황금을 찾아 신천지에 발을 디딘 이들은 곧 눈을 씻고 봐도 근처에 금싸라기 한 톨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낙담한 채 한 때 아사 직전까지 갔으나 이곳이 담배 재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노예를 수입, 노예 노동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한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한 사람들은 경제적 번영이 아니라 종교적 자유를 찾아 온 사람들이었다. 소위 ‘청교도’로 불리던 이들은 영국 국교의 박해를 피해 새 땅에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고자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모토로 내건 뉴잉글랜드 지역은 가장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의 하나였다. 비 기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청교도가 아니면 모진 박해를 받았다. 17세기 말 미국에서는 드물게 마녀 재판을 열어 무고한 시민들을 교수형에 처한 곳도 여기다.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한 남부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북부가 미국 역사의 출발이자 기본 틀이라는 게 지금까지 정통적인 미국 사관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에 대한 반론이 일고 있다.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 중간에 있는 중요한 도시 하나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대서양 최고의 항구 뉴욕이 바로 그곳이다.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요청을 받고 뉴욕과 이제는 그의 이름이 붙은 허드슨 강을 발견한 것은 1609년이다. 그가 네덜란드 국회(스타튼) 이름을 따 스태튼 아일랜드로 명명한 맨해튼 옆 작은 섬은 아직도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 1613년 네덜란드는 이곳에 식민지를 세우고 이를 ‘뉴 암스텔담‘이라고 불렀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자유롭고 진정으로 진보적인 나라였다.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경제는 윤택하고 정치적으로 시민의 기본권이 보장됐으며 어떤 종교, 어떤 종파를 믿던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한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신대륙으로 건너 간 청교도들이 한 때 몸을 피신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탄압을 피해 피난 온 사람은 청교도들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데카르트, 스페인의 스피노자, 영국의 로크 등등 당대의 쟁쟁한 사상가들이 모두 네덜란드의 거리를 거닐며 철학적 탐구에 몰두했다. 버트랜드 러셀은 “사상의 자유가 있는 곳을 논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뉴 암스텔담은 이런 네덜란드의분위기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네덜란드인은 물론이고 독일인, 이탈리아인, 스칸디나비아인, 유대인, 흑인 할 것 없이 모든 인종이 종교적 박해 없이 골고루 모여 살며 평화로운 상업 도시를 건설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 관용의 정신, 자유 무역 등등이 뉴 암스텔담과 그 지도자 아드리안 밴 더 동크의 기본 가치관이었다.
이같이 중요한 뉴욕의 초기 역사가 그늘에 가려져 온 것은 1667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결과 이곳을 차지하고 이름조차 뉴욕으로 바꾼 영국과 그 후예인 남북부 식민지 지도자들이 그 의미를 축소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뉴욕 주립 도서관에서 1만2,000페이지에 달하는 초기 뉴 암스텔담 역사에 관한 사료가 발견되고 30년 만에 그 번역 작업이 완료되면서 미국 역사상 뉴욕의 의미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저술이 러셀 쇼토 작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섬’(The Island at the Center of the World)이다.
신정주의와 종교적 독선이 판치던 뉴잉글랜드와 노예 노동과 인종차별을 바탕으로 한 버지니아,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신봉한 뉴욕, 이중 어느 쪽이 미국의 정신을 대표하며 해야 하는 것일까. 9/11 테러 5주년을 맞으며 뉴욕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본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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