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이 흘렀다. 100년의 미주 한인 이민 역사를 기록, 축하하는 각종 기념사업들로 한인사회를 온통 도배했던 것이….
말많고 탈 많았던 로즈퍼레이드 한인 꽃차 출품에서부터 작게는 음악회, 동네 골프대회까지 그해는 미 전국에서 이민 역사에 길이 남을 각종 이정표적 행사가 줄을 이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흔히 말하는 우리 민족의 ‘냄비 근성’ 때문일까, 데일 것 같이 뜨거웠던 백주년의 열기는 싸늘하게 식어간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미국 곳곳을 여행하다보면 “참 관리를 잘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관광지 관리도 그렇지만 역사와 이를 개발 또는 발견하며 관광지로 만들었던 인물 등등, 심지어는 말안장, 등잔불, 텐트까지 얼핏 고물상에서나 봄직한 물건들을 유물이랍시고 박물관을 만들어 가지런히 전시해 놓은 것을 보면 웃음도 나온다. 우리는 5,000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인데 불과 70~80년 전의 일들을 이렇듯 간직하고 있다니....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을 깊숙이 감추면서 말이다.
내가 정든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 온지도 벌써 20년째. 책보따리에 솜이불과 내의등을 잔득 담아낸 두 개의 이민가방을 들고 미시간으로 향했던 그때의 추억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기억도 그렇지만 한국의 지인과 주고받았던 편지도, 공항에 마중 나와준 파키스탄 여대생과 낑낑대며 기숙사까지 끌고 들어가던 거대한 이민가방 조차도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길이 없다. 이민 가방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그때의 각오를 새롭게 곱씹으며 더 열심히 살아가지 않을까.
기암 절벽의 캘리포니아 명물 킹스 캐년 길목에 오렌지밭 풍성한 소도시 리들리는 한인 이민 선조들의 숨결이 담겨 있는, 캘리포니아 한인 이민 역사의 시초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1910년부터 한국전쟁 무렵까지 많게는 7,000여명(리들리시 추정)의 한인들이 반세기동안 한인 촌을 형성하며 살았었다.
불과 1세기 역사도 안되는 리들리에도 마을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이라고 해봐야 시골 초가집 보다로 작은 집이지만 옛날 이곳에 정착했던 주민들이 쓰던 잡다한 물건들이 전시돼 있다. 물론 리들리시는 도시로 이름 붙여지기도 전에 정착해 살았던 한인 거주자들을 기리는 기념관(한국실)까지 이곳에 마련해 두었다. 아쉬운 것은 전시품들 중 옛 한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물품들은 하나도 없고 대부분 요즘 선물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나마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자료들이기는 하지만 캘리포니아 초기 이민, 특히 미 전국으로 뻗어가는 첫 정착지였던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자료들이다.
얼마전 첫 한인 이민자 103명이 게일릭호에 올라 정든 고향을 등지고 하와이로 향했던 인천 부둣가에 이민사 박물관이 들어선다며 관계자들이 미국을 방문했었다. 이들은 방문목적은 전시할 옛 이민자들의 소지품들을 모으기 위한 것. 이민 가방에서부터 모자, 신분증, 구두 등등. 흔히 집안 한 구석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법한 물건들이다. 가본 적은 없지만 뉴욕 자유의 여신상 앞 작은 섬 ‘엘리스’에 전시된 이민자들의 각종 소지품들을 연상시킨다.
이곳 한인들이 보존 관리해야 할 일들을 인천에서 맡아 한다는 생각에 한편 부끄럽기까지 했다. 새로운 이민 100년의 역사를 써나가자던 우리의 각오가 불과 3년여만에 스르르 녹아 내리는 것일까.
아직도 우리가 세우고 바로 써야할 미국 한인들만의 고유 역사 발굴, 보존 과제가 산적해 있다. 파묻혀 있던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워 후세에 남기겠다는 의도로 제작된 주몽과 연개소문 드라마에 이곳 한인들도 푹 빠져있다. 역사 의식이 남다른 우리 한인들이 멀리 고국의 역사 재발굴 노력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100년 짧은 이민 역사를 복원, 이곳에 보존해야 하는 것도 한국의 역사 재발굴 노력에 박수를 보내는 것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김정섭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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