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박물관이 처음 생긴 것은 1909년이다. 대한 제국 말기 창경궁에 ‘제실(帝室)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세워졌던 이 박물관은 그 후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복궁에서 덕수궁, 다시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작년 10월 용산에 새 터를 잡았다. 새로 지은 건물답게 널찍널찍 하고 깨끗한 것이 관광 명소로 손색이 없다.
3층으로 된 이 박물관은 역사관, 미술관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발해관이다. 옛날 역사 시간에 3국시대의 부록 정도로 취급되던 발해를 고구려를 승계한 정통 국가로 인정해 별도의 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는 발해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과 함께 옛 발해의 지도가 걸려 있는데 이걸 보면 발해는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등 현 만주 3성과 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를 포함한 대국이었을 뿐 아니라 구성 민족도 말갈과 거란을 포함하는 그야말로 제국이었다. 한 때는 한민족이 지금의 중국과 러시아 땅을 아우르는 대국의 주인이었다는 의식이 배어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앞으로 한 동안 국립 박물관에 가보지 않더라도 ‘우리도 한 때는 잘 나가던 민족이었다’는 자부심 속에 살 것 같다. KBS, MBC, SBS 등 방송 3사가 앞을 다투어 고구려와 발해를 무대로 한 대하 사극을 내보낼 예정이기 때문이다. 15일 MBC 특별기획 드라마 ‘주몽’이 고구려 시대의 문을 연데 이어 6월에는 SBS의 ‘연개소문’, 8월에는 KBS의 ‘대조영’, 그후에는 다시 광개토왕의 일생을 다룬 SBS의 ‘태왕 사신기’등이 전파를 탈 예정이다.
‘주몽’에는 ‘허준’의 전광렬이 출연하고 역시 ‘허준’을 쓴 최완규 작가 등이 대본을 맡았으며 ‘연개소문’은 ‘용의 눈물’의 유동근이 주연을 맡고 ‘용의 눈물’로 이름을 날린 이환경 작가가 썼다. ‘태왕 사신기’는 ‘모래시계’로 히트를 친 김종학 프로덕션과 송지나 작가가 참가하며 광개토왕 역은 ‘욘사마’ 배용준, 발해를 세운 대조영 역은 최수종으로 결정 났다.
제작비만도 ‘대조영’은 KBS 사상 최고인 440억, ‘주몽’이나 ‘연개소문’도 이에 못지 않은 380억과 410억이 책정돼 있으며 ‘태왕 사신기’또한 역대 최고인 560억 원이 투자된다. 그야말로 방송 3사가 고구려에 사활을 건 양상이다.
이처럼 한국에 불고 있는 고구려 열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첫째는 한국에 불고 있는 민족주의 바람이다.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 중국의 동북공정 등으로 한국인들은 어느 때보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특히 중국의 역사 왜곡은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더 심각하다. 중국은 최근 교과서에서 고대 고구려사 부분을 아예 삭제하고 국내성 등 고구려 유적지에서 한국인의 사진 촬영을 금하는 등 만주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한국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관심은 이에 대한 반발적인 측면이 크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영웅이 없고 별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좌절이 광대무변한 대륙을 호령하던 인물과 시절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주몽’의 시사회가 열리던 것과 거의 동시에 한 때 ‘단군 이래 드문 영웅’으로 추앙 받던 황우석 박사가 사기 횡령 혐의로 기소됐다는 뉴스가 터졌다. 60여 개의 차명 계좌를 만들어 연구비 명목으로 받은 수십 억을 돈 세탁, 검찰도 자금 추적을 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노벨 의학상이 아니라 노벨 사기상 후보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지방 선거를 보름 앞두고 집권당은 한 표를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제주와 호남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고 있다. 아무리 악재가 터져도 요지부동이다. 한나라당도 싫지만 열린 우리당은 더 싫고 해먹기로 말하면 똑같은 놈들인데 뭘 그러냐는 것이 국민 정서다. 이래저래 한국에서의 고구려 열풍은 오래 갈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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